(30) 한산과 안골포 해전 평가
- 작성일
- 2022.10.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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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0회 한산과 안골포 해전 평가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한산과 안골포 해전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은 무산되었다.
일본 언론인이자 군국주의 괴벨스인 도쿠토미 소호(1863~1957, 본명은 도쿠토미 이이치로)는 저서 ‘근세일본국민사’에서 “한산 해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사망 선고를 내린 해전이다.”이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그는 “한산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은 제해권을 상실했고, 육전에서도 일본군이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며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고 평했다. (이민웅, p 179)
한산과 안골포 해전의 패전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7월 16일에 도도 다카도라에게 지시하여 (1) 앞으로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상대가 접근해 오더라도 추격하지 말 것 (2) 거제도 등 해안에 성을 쌓고 해안선을 따라 싸울 것 (3) 부산포에서 경남 해안에 걸쳐 보급로를 유지할 것 등을 명하였다. (기타지마 만지, p 115)
게다가 한산해전의 결과는 임진왜란 전쟁 상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한산대첩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에 앞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도착하여 ‘일본 수군이 10만명이 지금 또 서해를 통하여 오고 있는데 어가는 또 어디로 가시렵니까?’라는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왜군은 원래 육군과 수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한 번 해전에서의 패배로 왜군의 한쪽 팔이 끊어져 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비록 평양을 빼앗았다고는 하나 그 형세가 외롭게 되어 더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 해전으로 전라·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해지역 일대까지 지켜냄으로써 군량을 조달하고 조정의 명령이 통하여 중흥할 수 있었다.
또한 요동의 금주·복주·해주·개주·천진 등지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서, 명나라 군대가 육로를 통하여 구원하려 와 왜적을 물리친 것 또한 이 한번의 전투 때문이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순신은 3도의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에 주둔하여 왜적이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끊었다. ”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2013, p 313-314 ;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2014, p 160-161)
명나라도 이순신의 한산해전을 극찬하였다. 흠차부도어사(欽差副都御史) 형개(邢玠)가 우리측에 보낸 자문(咨文)에 나온다. (선조실록 1597년 9월 20일)
"조선의 형세를 말하다면 전라·경상 2도(道)야말로 가장 중요하니, 경상도는 문호(門戶)이며 전라도는 부장(府藏)이기 때문입니다. 경상도가 없게 되면 전라도가 없게 되고 전라도가 없게 되면 다른 도가 있어도 조선은 끝내 의거하여 근본을 삼을 만한 계책이 없게 되니, 이곳이야말로 왜적이 반드시 쟁취하려는 곳으로서 우리가 그곳을 지키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
또 해도(海道)로 말하더라도 왜적이 만약 전라도를 점거하게 되면, 멀리는 서해 일대에서부터 가깝게는 진도·제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왜적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적선이 해상을 거침없이 오가면서 통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면 1∼2일 정도 순풍만 불어도 압록강까지 도달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개성과 평양도 족히 견고하게 될 수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육로로 평양에 도달하고 또 수병(水兵) 수만 명이 전라도를 침범하여 장차 서해로 우회하여 나오려 했었는데, 마침 조선의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적을 제압하여 다행히 승전하였으므로 왜적이 마침내 패전하고 퇴각하여 감히 수륙(水陸)의 형세를 합하여 멋대로 기세를 부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인데 흉악하고 교활한 왜적이 하루도 이 계책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또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비를 급급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략의 이유라 하겠습니다.”
한편 아시아 해양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는 1921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일본 정치 역사에 미친 바다의 영향(The Influence of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한산해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2)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꺼져갔다. 그것은 위대한 조선 제독 이순신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불과 6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 해전 사상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연전연승의 공을 세웠다. 넬슨, 블레이크, 장바르라 할지라도 이순신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김종대, p 159,)
또한 파란 눈의 애국자로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호머 헐버트(1863-1949)는 1906년에 발간한 저서‘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제6장 조선의 황금기와 임진왜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만든 철갑선을 타고 왜적과 교전했다. 그는 거북선으로 왜선의 좌우를 협공해 전 함대를 거의 격파했다. ...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왜의 침략 야욕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2019, p 122-123) 3)
한편 1943년 4월 22일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는 상원에서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
“세계에서 일본을 나라는 조선 뿐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는데, 1592년에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 철갑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일본 해군을 함몰시켰습니다. 그 뒤 조선은 360년 동안을 무사히 지냈습니다. ”
미국에서 발행된 한인 교포신문 ‘국민보’ 1943년 6월 2일자에는 와일리 상원의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미국이 승인해야 한다고 연설한 내용이 실려있다. (박종평, p 160)
1943년은 태평양 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 전투기 360여 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 폭격했다. 미국은 즉시 일본에 선전 포고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선도 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었다.
태평양 전쟁 초반 전세는 일본에게 유리했다. 일본은 말레이 반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자바섬을 점령했다. 극동의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일본군에 궤멸되었다.
그런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이 해전이후 일본은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일본의 미드웨이 해전 패배는 16세기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전이후 일본의 첫 패전’이라고 적었다.
특이한 점은 이에인 딕키등 5명이 지은 ‘해전의 모든 것(2010년 발행)’에는 BC 1190년의 이집트 해전부터 1942년의 미드웨이 해전까지 20개 해전중에 1592년 한산도 해전이 소개되어 있는 점이다.
여기엔 BC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BC 31년의 악티움 해전, 1588년의 그라블린 해전 (영국 vs 스페인), 1592년의 한산도 해전(조선 vs 일본),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 (영국 vs 프랑스-스페인), 1905년 쓰시마 해전(일본 vs 러시아), 1916년 유틀란트 해전(영국 vs 독일), 1942년의 미디웨이 해전(미국 vs 일본)의 전략, 전술, 무기, 지휘관 그리고 전함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 ‘해전의 모든 것(p 126-139)’에 소개된 한산도 해전을 살펴보자
“ 1592년 한산도 해전 : 철갑 거북선, 무쇠 대포
1592년, 조선 수군은 천자문의 첫 네 글자 천지현황을 활용해 네 개의 표준화된 대포부대를 소유함으로써 심지어 영국군보다 앞서 있었다. (...)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백병전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판옥선에 높은 현측을 설비했다. ... 철갑을 두른 축소된 판옥선이란 발상을 통해 이순신으 ㄴ다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수군 무기를 만들어 냈다. ... 거북선이 들이받기 공격을 어떻게 실행했을지도 하나의 의문이다. ...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일본을 상대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뒤늦게야 이순신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 이순신의 연이은 승리로 조선은 5년동안 여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이동안 히데요시로선 침공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마지막 해전중에 이순신은 치명상을 입었다. 당시 수군통제사의 최후 명령은, 방패로 자기 시체를 가려 다른 병사들이 의기소침해지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해상에서 기술에 대한 믿음은 한 번뿐이 아니라 거듭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심지어 그런 기술을 구현한 형태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을 때도 그랬다. 그리스의 불화살, 외돛상선과 장궁, 갈레아스 전함과 대포 운반대, 이 모든 무기들은 서구에서 과학기술적 혁신의 성과물이었다. 한편 이순신과 그의 거북선은 그가 구하고자 했던 나라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적어도 몇 군데에서 선상(船上) 혁신을 통해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념이 생겨났다. 용골, 해군 대포, 범선으로 특징지어지는 대포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그런 신념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
전쟁에서 과학 기술 무기의 중요성은 어제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북선은 조선 해전사에 길이 남을 과학기술적 혁신물이다.
주1) 도쿠토미 소호는 1920년 9월1일부터 1921년 7월5일까지‘근세일본국민사’를 신문에 연재하였다.
주2) 김태훈(p 212-213)과 박종평(p 160-161)은 헐버트가 한산대첩을 살라미스 해전으로 비유하였다고 적었다. 즉 BC 480년에 데미스토 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함대 300여 척이 페르시아 함대 800척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해 격파했듯이, 조선의 이순신도 한산도 근처에서 일본 함대를 학익진으로 섬멸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에는 한사대첩을 살라미스 해전에 비유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3) 영국 해군 제독 발라드의 이순신 극찬 내용이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 그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넬슨과 어깨를 견줄만한 또 다른 인물이 같은 분야에 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그는 패배라는 것을 전혀 모른채 전투 중에 전사한 아시아인 해군 사령관(이순신)일 것이다. 그의 전투행적은 한반도 연안 바다속에 용감했던 수병들과 함께 가라앉은 수백 척 일본 전함들의 잔해로부터 도출해 낼 수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단언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고하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수없이 다양한 상황에서도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져 비판의 여지가 없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면 지난 역사에서 참고할 만한 전례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실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취해야 할 방법대로 해전을 수행하였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써 숭고한 희생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 참고문헌 )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박종평, 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꿈결, 2017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에인 디키 등 5인 지음·한창호 옮김, 해전의 모든 것, Human &Books, 2010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사토 데스타로 외 지음 ·김해경 옮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가가날, 2019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헐버트 지음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