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당항포 해전
- 작성일
- 2022.09.2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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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24회 당항포 해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6월 5일은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어 이순신·원균·이억기의 조선연합함대 51척은 늦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연합함대가 거제로 도망친 왜적을 토벌하려고 출전할 무렵에 거제에 사는 귀화인(歸化人 일본에서 귀화한 백성) 김모(金毛) 등 7, 8명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당포에서 쫓긴 왜선들이 고성땅 당항포(고성군 회화면 당항리)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이순신은 급히 연합 함대를 고성 땅 당항포로 이동하였다. 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남으로 진해 쪽을 바라보니 진해성(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바깥 몇 리쯤 되는 들판에 무장한 군사 1천 명이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은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결과 이들은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당항포 바다 어귀의 형세를 물어보니 “거리는 10여 리나 되고 넓어서 배가 들어갈 만하다.” 하였다.
이런 정황을 알게 된 이순신은 먼저 3척을 보내 “포구 내의 지형을 상세히 조사해 오되, 만약 적이 추격해 오면 짐짓 물러나 적을 끌어내도록 하라”고 엄하게 지시하였다.
이윽고 이순신은 몰래 숨어있다가 기습할 계책을 세웠다. 얼마있다가 포구내로 들어갔던 전선이 바다 어귀로 되돌아 나오면서 신기전을 쏘아 ‘빨리 들어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전선 4척을 바다 어귀에 머물며 복병하도록 지시한 뒤에 노를 재촉하여 포구로 들어갔다.
당항포는 양편 산기슭이 강을 끼고 20여 리(8km)나 되며, 그 사이의 지형이 그리 좁지 않아서 싸울 수 있는 곳이었다. 1)
그래서 여러 전선이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일제히 들어가면서 선수와 선미를 서로 이어 소소강(召所江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의 포구이다.) 서쪽 기슭에 이르자 2), 검은 칠을 한 왜선이 크기가 판옥선만한 것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등 모두 26척이 기슭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큰 배는 뱃머리에 따로 판자로 된 3층 누각을 만들어 세웠고, 벽에는 단청을 칠한 것이 마치 불당(佛堂) 같았으며, 전면에는 푸른 일산 (日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우는 큰 양산)을 세우고 누각 아래는 검게 물들인 비단 휘장을 드리웠고, 그 휘장에는 흰 꽃무늬를 크게 그렸는데, 휘장 안에 왜인들이 수없이 죽 벌려 서 있었다.
또 왜 대선 4척이 포구 안쪽으로부터 나와서 한곳에 모이는데, 모두 검은 깃발을 꽂았고, 깃발마다 흰 글씨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化經)이란
일곱 글자가 씌어 있었다. 3)
왜군들은 조선 함대를 보자 조총을 콩 볶듯이 마구 쏘아 댔다. 이순신은 적선 4척을 포위 공격토록 하고 거북선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거북선이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 적의 대선을 꿰뚫게 하고, 여러 전선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총통과 철환을 우레처럼 쏘면서 한참 동안 접전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적이 전세가 불리하면 또다시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올라가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는 적선들을 모두 넓은 바다로 끌어내서 섬멸하고자 유인 작전을 폈다.
조선 함대가 일시 퇴군하여 한쪽을 개방하자, 왜군들은 대장선인 3층 배를 호위하며 모든 배들이 바다로 나왔다. 조금 후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마침내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전선들은 4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격을 가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 4)이 왜장이 탄 층각선 밑에 접근하여 포를 쏘아 층각선을 깨트리고, 다른 아군 배들이 불화살을 적선의 비단 장막과 돛에 쏘아 맞혔다. 마침내 대장선의 왜장이 화살에 맞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왜장이 죽자 다른 왜선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순신과 이억기 수군은 달아나는 왜선들을 포위하여 적을 사살하니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43개이고 왜선은 1대만 빼고 전부 불태웠다.
그런 다음 이순신은 일부러 배 1척만 남겨두고 돌아갈 길을 열어 놓았다.
날이 어두워져서 육지로 오른 왜적들을 모조리 죽이지 못했으나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어둠을 타고 바다 어귀로 되돌아 나와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5)
6월 6일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전날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틀림없이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바다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는 배를 이끌고 바다 어귀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왜선을 잡아 놓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급보를 보내왔다.
“오늘 새벽녘에 당항포 어귀에 도착해 기다리니, 과연 조금 있다가 왜선 한 척이 바다 어귀로 나왔습니다. 재빨리 돌격하였는데 그 배에 타고 있는 왜군은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배가 먼저 지자 현자 ·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철환·질려포·대발 화포 등을 연속 쏘고 던지자 왜적들은 허겁지겁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도망을 치려고 하기에 요구금(要鉤金 쇠 갈고리)을 사용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니 왜적들은 절반 넘게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이가 24, 5세쯤 보이는 왜장은 용모가 건강했고 군복은 화려했으며, 칼을 차고 홀로 서서 남은 부하 8명을 지휘하여 대들어 싸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방담첨사 이순신)이 힘껏 활을 쏘아 맞추니, 왜장은 화살을 10대나 맞고서야 악! 소리를 지르며 물로 떨어지기에 곧 목을 베게 하고, 다른 왜적 8명은 군관 김성옥 등이 힘을 모아 총과 활을 쏘아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진시(오전 8시)에 적선을 불태울 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늦게 그곳에 와서는 물에 빠져 죽은 왜적을 찾아내어 건져 목을 베었는데 50여 개나 되었습니다. 6)
그리고 왜장이 탄 배의 앞머리에는 별도로 시원한 방(凉房)을 만들었는데 방안의 장막은 극히 화려했으며, 곁에 있는 작은 궤 안에 문서를 가득 넣어 두었기에 살펴보니, 왜인 3,040명의 분군기(分軍記 부대별 군사 명단)였습니다. 자기 이름 아래 서명하고 피를 발라 둔 것이 필시 삽혈(歃血)하여 맹세한 문서인 듯 합니다. 그 분군기 6축을 비롯하여 갑주, 창, 칼,활, 총, 표범가죽, 말안장 등의 물건을 올려 보냅니다.”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직접 그 분군기를 살펴보았더니 이름을 쓰고 피를 바른 흔적이 보고와 같았는데, 그 흉측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한편 왜적의 깃발은 염색이 각기 다른데, 이전에 옥포에 있던 왜적의 깃발은 적색이었으나 오늘 사천 왜적의 깃발은 백색이고, 당포는 황색, 당항포는 검은 깃발인데, 그 까닭은 틀림없이 각자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이순신은 보았다.
그런데 6일은 짓궂게도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구름이 짙게 끼어 바닷길을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당항포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 고성 땅 맛을간장(亇乙干場 고성군 동해면 전도리의 맛개마을로 추정)에서 정박하였다. 7)
한편 당항포에서 겨우 살아남은 왜군들은 육지로 도망갔는데 그곳을 ‘도망개’라고 한다. 도망갔던 왜군들도 멀리가지 못하고 배를 둔 남쪽 갯가에서 대부분 잡혔고, 그곳을 잡안개’라고 불린다.
(이봉수, p 182 )
8월 16일에 조정의 비변사는 선조에게 당항포의 대첩을 논상하라고 청하였다. (선조실록 1592년 선조 25년 8월 16일 5번째 기사)
“비변사가 아뢰었다.
‘전쟁이 일어난 이래 제장(諸將)이 한결같이 퇴패(退敗)만을 거듭하였습니다. 작은 승첩이 있다 하더라도 몇 명씩 떼 지어 다니는 보잘것없는 적과 싸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제 당항포에서 왜적과 만나 비로소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전후 공을 보고한 것 중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별도로 논상(論賞)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조가 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이순신은 전에 이 일로 가자(加資)하였으나 개품(改品)이 없었으니 초자(超資)하도록 하라.’”
한편 당항포 해전과 관련하여 ‘아랑낭자 이야기’와 ‘기생(妓生) 월이 이야기’가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다.
아랑낭자 이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본의 간첩이 당항포 해역의 지도를 그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는데, 주막을 하던 아랑낭자가 한 눈에 그를 알아보고 술을 먹여 재운 다음 지도를 조작하여 막힌 바다를 터진 바다로 그렸다. 이 때문에 당항포 싸움에서 왜군이 졌다는 것이다.
‘기생 월이 이야기’는 기생 월이가 무기정(舞妓亭)에서 일본 간첩을 접대하면서 일본첩자의 당항만 지도를 조작하여 왜군이 당항포 전투에서 졌다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 사람만 바뀌었을 뿐 비슷하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것에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 재미있게 만든 스토리 텔링이라 할 수 있다. 8)
주1) 이순신이 1592년 6월 14일에 조정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에 주로 의존하였다.
주2) 소소강(召所江)은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의 포구이다(배상열 p 312, 김종대 p 144) 소소강은 실제 강이 아니라, 바다 어귀에서 당항포까지 이르는 좁은 바다가 마치 소리쳐 부르면 맞은 편에서 들릴 정도로 좁은 강처럼 길게 생겼기에, 당시는 이곳을 소소강이라 불렀던 것이다.(이순신 역사 연구회 저,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 p 210)
이에 의하면 왜군 함대는 처음에는 당항포(고성군 회화면 당항리)가 아니라 좀 더 서쪽인 마암면 두호리에 포진하고 있었다.
주3) 당항포의 수군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수송한 수군으로 추정된다.
주4) 이순신은 ‘당포파왜병장’에서 돌격장이라고 표시하였다. 이후 한산대첩에서는 좌돌격장, 우돌격장이라고 표시했다. 따라서 당항포헤전에서도 거북선이 한 척 출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5) 6월 5일의 ‘난중일기’이다.
아침에 떠나서 고성 당항포(당항포는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에 있는데 지형이 닭의 목처럼 생겨서 닭목이라 했는데 말이 변하여 당목 또는 당항이 되었다.)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버티고 서있는데 우리나라 판옥선 만큼 컸다. 배 위에는 누각이 우뚝하고 적의 장수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중간배가 12척이고 작은 배가 20척이었다. 한꺼번에 무찔러 깨뜨리고자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댔다. 화살에 맞아 죽은자가 얼머인지 가히 알 수 없었다. 왜장 머리는 일곱을 베었고 살아 남은 자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주6) 원균과 기효근은 싸우지도 않고 왜군의 목 50여 개를 베어 군공을 챙겼다. 그런데 조정은 적을 벤 것으로 포상을 하였다.
1592년 8월 24일의 선조실록이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 현령 기효근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후략)”
주7) 6월 6일의 ‘난중일기’이다.
맑다. 적선을 살피면서 거기서 그대로 잤다.
8) 이민웅은 ‘이순신 평전(p 254)’에서 당항포 해전과 관련한 ‘아랑 낭자 설화’를 소개하였다. 한편 황현필은‘이순신의 바다(p126-127)’에 ‘기생 월이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월이가 조작한 일본 첩자의 지도’까지 삽입하였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1권, 비봉출판사, 2006
o 배상열, 난중일기 외전, 비봉출판사, 2007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 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이순신 역사연구회 저,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비봉출판사, 2005
o 조성도, 충무공 이순신, 연경문화사, 2004
o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바연,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