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당포 해전
- 작성일
- 2022.09.2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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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23회 당포 해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당포해전
거북선이 첫출전한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솔 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았고 1) 군관 전 봉사 이설도 화살을 맞았다.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은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내니 깊이가 두 치(약 6cm)나 되었다. 온 군중이 비로소 알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순신은 태연하게 웃으며 주위를 안심시켰다. 2)
6월 1일에 이순신은 함대를 고성 땅 사량도로 이동하여 정박하고 군사를 쉬게 했다.
이튿날인 6월 2일 오전 8시경에 이순신은 ‘왜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에 따라 함선을 즉시 출발시켜 10시쯤 당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당포 선창에는 약 300여 명의 왜적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은 성안에서 분탕질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성 밖의 험한 지형에서 조총을 쏘며 대항했다. 정박 왜선은 대선 9척과 중간 배와 작은 배 12척으로 모두 21척이었다.
그 중에 대선 한 척은 높이가 6~7미터 정도 되는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그 주위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둘렀고, 휘장 사면에는‘황(黃)’자를 크게 써 놓았다. 왜장은 일산(日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우는 큰 양산)을 쓰고 있었는데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거북선이 선두에 나서 왜장이 탄 대선을 공격하여 왜군을 교란시킨 뒤 이어서 판옥선이 일제히 화포를 쏘아대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순신이 명령하자, 거북선은 왜장이 탄 누각 대선 아래를 파고들면서 용머리에서 현자총통을 먼저 쏘았다. 이어서 천자·지자총통과 대장군전(大將軍箭) 3)을 쏘아 누각대선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대장군전은 한마디로 말해 ‘대포의 철환’이다. 창끝같이 큰 활촉에 쇠 날개까지 붙은 대형 화살로 돗대가 맞으면 두 동강나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거북선의 1차 공격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군 장수들이 탄 판옥선이 일제히 철환과 편전 및 승자총통 등을 쏘았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이 활로 왜장을 쏘아 가슴을 맞추자, 왜장이 층루에서 떨어졌다. 이러자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흥양보인 진무성이 배로 뛰어 올라가서 왜장의 목을 베었다.
이어서 조선 수군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포탄과 화살을 쏘아대니 왜적들은 겁내어 도망쳤고, 물에 빠져 헤아릴 수 없이 죽었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은 왜선 21척을 모두 불살랐다. 이어서 조선수군들은 상륙하여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려 했다.
바로 이때 외양(外洋)에 파견해 두었던 탐망선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왜군 대선 20여 척이 다수의 작은 배들을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육지의 추격 작전을 중지하고 모든 전선을 외양으로 이동케 하였다. 그때 당포로 향하던 왜선들은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서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였는데, 왜군 함대는 그 순간부터 도망치느라 분주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이들을 추격하였지만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추격을 하지 않고, 진주 땅 창신도(昌新島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로 모든 전선을 이동하게 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이 날 밤에 이순신은 우후 이몽구와 소비포 권관 이영남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먼저 좌별도장인 우후 이몽구가 대장선을 수색하여 발견한 금부처를 이순신에게 바쳤다. 옻칠한 갑 속에 든 금부채에는 한쪽 중앙에 ‘유월팔일 수길(六月八日 秀吉)’이라 서명하였고, 오른편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다섯 글자가,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이란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순신은 ‘당포파왜병장’ 장계에서 금부채는 수길이가 축전수에게 부신(符信)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여기에서 축전수(筑前守)는 히데요시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로부터 받은 관위로 이때 그의 성명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4) 따라서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는 히데요시(수길)인데, 이순신은 수길과 축전수가 딴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금부채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1536~1598)가 1582년에 가메이 코레노리(亀井茲矩 1557~1612) 류큐(琉求) 영주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금부채에는 히데요시가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과정이 들어 있다. 1582년에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는 100년간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천하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1582년 6월에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교토 혼노지(本能寺)에서 자결했다. 이때 모리와 전투 중이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급사소식을 듣고 모리와 화의를 맺고 즉시 교토로 진군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패퇴시켰다. 이 때 가메이 코레노리가 히데요시를 도왔다. 자기를 도와준 무장들에게 영지를 주는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코레노리에게 주기로 한 영지를 줄 수 없게 되자 다른 땅으로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코레노리는 당시 일본이 점령하지 못한 류큐왕국(琉球王國, 오키나와)을 떼어달라고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가메이 코레노리의 포부에 감탄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금부채에 코레노리를 류큐 영주로 임명한다고 써주었다. (박종평, 2013.4.1자 경향신문)
그런데 이 날 가메이 코레노리는 금부채를 버리고 도망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섬겼다. 한편 이순신은 이 금부채를 조정에 올려 보냈다.
이어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이 왜장선에서 구출한 울산 사삿집 계집종 억대와 거제 소녀 모리 등을 이순신에게 데려왔다. 이순신이 직접 문초한바, 여종 억대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겪은 치욕과 적장의 최후를 답하였다.
“날자는 기억할 수 없으나, 15일 전 왜적에게 포로로 붙잡혀서 왜장에게 몸을 더럽히고 늘 한곳에 있었습니다. 왜장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크고 기력이 무척 강했으며 나이는 30세 가량 되었습니다. 낮에는 누른 비단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는 배위의 층루에 높이 앉아 있었고, 밤에는 방에 들어와서 자는데 이부자리와 베개가 아주 사치스러웠습니다.
다른 함선에 탄 왜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와서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듣는데, 명령을 위반하기만 하면 용서 없이 목을 베었습니다. 때로는 술을 가져와 바치고서는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었으나, 왜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울산, 동래, 전라도 등의 말은 우리나라 말과 같았습니다. 접전(接戰)할 때, 왜장이 앉아 있는 층루에 화살과 철환이 퍼부어져서 처음에 이마를 맞아도 안색이 태연하였는데, 곧 화살이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자, 제정신을 못차리고 층루에서 떨어졌습니다. ”
이순신은 장계에서 여종 억대가 증언한 왜장이 분명히 ‘우시축전수’라고 보고했다. 이순신이 잘못 보고한 것이다.
# 전라우수군의 합류
6월 3일 새벽부터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는 왜선을 찾기 위해 추도(楸島 통영군 산양면) 근처의 섬들을 수색하였지만 왜군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 이순신은 고성등지로도 가보고 싶었지만 우리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고 그냥 고성땅 고둔포(古屯浦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 고둔개)에 정박하였다. (1592년 6월 3일 난중일기)
4일 이른 아침에 연합함대는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작은배로 하여금 적선을 탐방하게 하였다. 10시쯤 당포에 사는 토병(土兵) 5) 강탁이란 사람이 산으로 피난갔다가 멀리서 조선 함대를 보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 2일 당포에서 접전이 있은 후에 살아난 왜군들은 통곡하면서 죽은 시체를 모아 한 곳에 불사르고 육로로 달아났습니다. 달아날 때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죽일 생각도 못하고 통곡하면서 달아났습니다. 당포 왜양에서 쫓겨간 왜선은 오늘 거제로 갔다 하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과 적선을 찾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배를 띄우려 할 때에, 멀리 서쪽으로부터 전라우수사 이억기 6)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때가 12시였다. 26척(이순신 23척, 원균 3척)의 전선으로 계속된 전투를 하여 피곤해진 수군에게 전라우수군이 나타나자, 조선 수군들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순신은 원균, 이억기와 함께 왜적을 쳐부술 계책을 의논하였다. 날이 저물었으므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착량 앞바다로 가서 진을 쳤다.
1) 나대용의 ‘행장(行狀)’등에는 나대용이 사천과 당포해전에서 부상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59년 9월 나병상이 지은 기행(紀行)’에는 ‘사천싸움에 유탄에 맞아 왼쪽 다리를 관통하였고, 당포싸움에서는 적의 철환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2015 p 88-89), 1860년 5월에 임병원이 지은 ‘행장(行狀)’과 1872년 5월에 홍순형이 지은 ‘행적(行蹟)’그리고 1920년 1월 이승욱이 지은 ‘체암 나공 묘비명 병서’에는 사천해전에서 철환을 맞아 왼쪽 다리를 관통하였고, 당포해전에서는 이설과 함께 철환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위 책, p 84, 93-94, p 123) 또한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가 제공한 ‘나대용 장군 약사(略史)’에도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적탄을 맞아 부상당하기도 하였고, 6월 2일 당포싸움에서 재차 철환을 맞아 부상당했다’고 적혀 있다. (위 책, p 303)
그런데 이순신의 ‘1592년 5월 29일 자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의 ‘당포파왜병장’에는 나대용은 이순신, 이설과 함께 사천해전에서 부상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당포해전에서 나대용이 부상 당한 기록은 없다. 1975년 7월 이은상이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에는 사천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부상 당한 것만 적혀 있다.
필자의 견해는 나대용이 사천해전에서 부상당한 것은 확실하나, 당포해전에서도 부상당했는지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2) 이순신은 이때 부상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1593년 3월에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 “접전할 때에 조심하지 못하여 적탄을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쓴 것으로 미루어 상처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박기봉, p 304-305)
3) 대장군전(大將軍箭)은 조선시대에 천자총통(天字銃筒)에 사용하던 화살이다. 화살의 전신(箭身)은 벌목(伐木)한 지 2년 된 목재로써 총길이 11척9촌, 지름 5촌으로 그 무게는 50근에 이른다. 길이 7촌의 철촉을 전(箭) 끝에 끼워 발사하면 900보에 이른다. 천자총통에 이 화살을 실어 화약으로 쏘아 적진에 떨어뜨리면 적들이 놀라고 두려워 혼비백산하여 수족을 못 쓰게 되니, 대개 신통한 위엄을 보여 적의 기개를 놀라게 한 까닭에 대장군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히데요시의 처음 이름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이다. 오미 국을 평정한 뒤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치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 1585년에 관백이 되자 그는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豐臣)라는 성(姓)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되었다.
주5) 토병(土兵)이란 비정규군으로서 변방의 각 진보(鎭堡)에 설치되었던 특수군이었다. 토병이 될 수 있는 자격은 그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현지의 지리뿐만 아니라 적정(敵情)을 파악할 수 있는 자라야 가능했다.
주6) 전라우수사 이억기(1561-1597)는 이순신(1545-1598)보다 16살이나 아래인 31세의 젊은 장군이었다. 왕실의 후손인 그는 나이 17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21세에 종3품 경흥부사, 26세에 온성부사를 하였고 1592년에는 순천부사를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이억기는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순절하였는데 그의 신위는 여수 충민사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1권, 비봉출판사, 2006
o 박종평, 이순신 장군의 노획품 ‘일본 금부채’는 어디로, 2013년 4월 1일자 경향신문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 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