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거북선에 대하여 2
- 작성일
- 2022.09.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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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22회 거북선에 대하여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거북선 건조자 나대용
1591년에 나대용 장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병의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12월 24일 자 ‘선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1591년의 나대용 장군 약사(略史)도 ‘선조실록’과 같다.
“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 및 각종 전구 감조 군관이 되어 그 소임을 다함”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p 303)
이처럼 나대용은 1591년에 종제 나치용과 함께 여수로 달려가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제작을 건의했다. 그는 1587년에 훈련원 봉사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거북선 연구에 매진 한 결과 나주 거평 오륜동 앞 방죽골에서 거북선 실험 진수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나주 지역에는 지금도 ‘물방개 노래’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이랑 하지 말라
크게 싸울 장수 나와
낙랑 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둥둥 좋을 시고
빙글 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265)
나대용이 거북선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조상인 나유(羅裕 1224~1292) 때문이기도 하다. 나유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74년 1월 일본정벌에 필요한 300척의 전함을 건조할 때 담당 부부사(部夫使)가 되어 공장(工匠)과 인부 3,500여 명을 징집하는데 힘썼고, 원나라와 고려가 함께 한 제1차 일본정벌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종군하였다. 제2차 일본정벌 때도 합포(合浦)에서 3번이나 출진하였다.
또한 나주 대굴포(현재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는 1408년(태종8년)부터 1432년(세종 14년)까지 24년간 전라수영이 설치된 곳으로서 전선 24척, 수군 1,895명이 배치된 곳이어서 어릴 때부터 수군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충남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의 전시관에는 ‘이순신과 함께 싸운 사람들에 나대용이 적혀 있다.
“ 나대용(羅大用, 1556~1612) 거북선 건조 책임관
1591년에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아 적의 대선 두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각각 분전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1597년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한편 거북선 제작 기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온다.
1592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4월 12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나대용이 만든 거북선은 함포사격을 마쳤다. 그리고 한 달 보름 후인 5월 29일에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하여 맹활약을 했다.
#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몇 척인가?
그러면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몇 척이었나? 1592년에 거북선은 2척(전라좌수영 본영과 방답진)이었고, 1593년에 순천 거북선 1척이 추가되어 3척이 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 소속인 영귀선(營龜船)은 여수시 중앙동 전라좌수영 선소에서 건조되었고, 방답진 수군 소속의 방답귀선은 여수시 돌산읍 군내면 서외리 선소에서, 순천 도호부 소속 순천귀선은 여수시 시전동 순천 선소 (지금의 여수 선소 유적으로 굴강· 세검정 ·군기고 등이 있다)에서 건조되었다.
거북선은 1595년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엔 ‘한산도에 5척’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몰하고 말았다. 판옥선 120여 척과 거북선 5척도 모두 불타거나 침몰하였다. 이후 거북선은 다시 건조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1606년의 나대용의 성소에 의하면 정유재란이이 끝난 1599년에 거북선이 각 영에 각 1척씩 배치되었다고 되어 있다.
나대용의 상소는 1606년(선조 39년) 12월 24일의‘선조실록’에 나온다.
“ (경상우수사)겸삼도통제사(兼三道統制使) 이운룡이 치계(馳啓)하였다.
나주에 사는 전 현령(縣令) 나대용의 상소 내용에 ‘신은 나주에서 성장하였다. ... 신묘년(1591년) 연간에는 수사(水使)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되었다. (중략)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의 1백 25명 보다 적지 않으며, 활쏘기에도 불편하기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년(1599년)간에 순찰사(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의 군관(軍官)이 되어 별도로 전선(戰船) 25척을 감조(監造)하였을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후략)”
이처럼 나대용은 1599년에 거북선이 각 영(충청, 전라좌우수영, 경상좌우수영)에 각 1척씩 배치되었다고 적었다. 따라서 거북선은 총 5척이었다.
이후 1716년(숙종 42년) 8월 24일의 ‘숙종실록’에는 거북선이 5척이라고 나온다.
“ 지난해 겨울에 민진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전선(戰船)은 점점 그 제도를 잃어서 운용하기 어렵고, 선창(船倉)은 좋은 곳이 전혀 없으므로 썰물 때를 당하면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선창이 긴요하지 않은 곳은 전선을 병선(兵船) 두 척으로 바꾸어 만들면, 변란을 당하였을 때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고 배의 재목이 아주 모자라는 이때에 재력(財力)과 민폐(民弊)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그 뒤에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선을 쓴 지 이제 이미 수백 년이 되었으므로 배의 재목이 다 못쓰게 된 뒤에는 다시 만들어 구처(區處)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이제 선창이 좋지 않다 하여 고친다면 선창이 좋은 곳은 열 가운데에 하나도 못되므로 옛 제도는 죄다 폐기하게 될 것이니, 결코 고치기 어렵겠습니다.’
하니, 또 묘당에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주(覆奏)하기를,
"두 가지 말의 득실을 제도(諸道)의 각 곤수(閫帥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와 통제에게 널리 물었더니, 제도의 회첩(回牒)이 이제 동시에 이르렀는데 소견이 각각 다르고 또 방패선(防牌船)으로 고쳐 만들기를 청한 자도 있습니다. 총합하여 논하면 제도의 전선이 남아 있는 것은 1백 21척이고 또 귀선(龜船) 5척이 있는데, 전선을 방패선으로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은 다만 호남의 2척과 호서(湖西)의 4척과 경기(京畿)·해서(海西)의 각 3척뿐이므로 도합하여 12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옛 제도를 고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폐단을 줄이는 데에는 오히려 조금 보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숙종실록 1716년 8월 24일 4번째 기사)
이어서 1744년에 발행된 속대전에는 14척으로, 1808년에 발행된 만기요람에는 30척으로 나타나며, 현존하는 여러 수조도(수조도)에는 40여 척까지 나타난다. (정진술, 조선후기 거북선의 구조,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p 105-106 )
그런데 아쉽게도 1895년(고종 32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혁파되면서 거북선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1)
그러면 이순신은 거북선을 왜 적게 만들었을까?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기념관의 설명문에는 두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조선 수군의 주력전선은 판옥선이었으며 거북선은 적진을 교란시키는 돌격선이었다. 돌격선이라는 배의 성격상 많은 수가 필요하지 않아 적게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거북선은 덮개를 덮음으로써 공간이 좁아서 군사들이 활동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이 점도 거북선을 많이 만들지 않은 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곁들일 것은 거북선은 조정의 지원 없이 이순신이 자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북선 건조 비용을 모두 전라좌수영에서 조달했다. 이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순신은 본영에서 한 척, 방답진에서 1척, 순천도호부에서 1척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 사천해전 때 출전한 거북선은 몇 척?
상당수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사천해전에 거북선이 두 척 출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변동명은 당포파왜병장 장계에 ‘귀선 돌격장 급제 이기남 신의 군관 이언량’이라는 기록에서 2인의 돌격장이 거북선 2척을 이끌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변동명은 한산해전에서는 우돌격장 박이량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 보인 이언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3척의 거북선이 출전하였다고 보았다. (변동명, 1592년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건조,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p 56-57)
김종대도 거북선 돌격장 이기남과 이언량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사천해전에는 두 척의 거북선이 출전하였다고 보았는데,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을 이기남 우귀선 돌격정을 박이량으로 기용한 것으로 보아 거북선이 2척 출전한 것으로 보았다. (김종대, p 137, 152) 따라서 김종대는 한산해전에서는 이언량을 돌격장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2)
또한 황원갑(p 181)과 이봉수(p 174)도 사천해전에 거북선 2척 출전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임기봉과 윤영수는 사천해전에 거북선 1척이 출전한 것으로 보았다.
임기봉은 본영귀선은 1592년 4월 12일, 방답 귀선은 1차 출전 후 완성된 것으로 보았고, 2차 해전(사천)에는 본영 귀선만 출전했으며, 3차 해전(한산)때 본영 귀선과 방답 귀선이 출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임기봉, p 105-106)
윤영수(p 223-224)는 보인(保人) 이언량은 정식 돌격장이 아니라 이기남을 보좌하는 참모로 보았는데, 최석남의 저서를 그 근거로 들었다. 3)
“무과에 급제한 이기남이 정식 귀선 돌격장이었으며 무과에 급제하지 않는 보인 이언량은 귀선 돌격장 이언령의 보좌관이었다. (최석남 저, 구국의 명장 이순신, 상권 p 453)”
필자는 사천해전에는 본영 거북선 1척만 출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거북선이 두 척이라면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견내량파왜병장’장계처럼 좌돌격장, 우돌격장이라고 명확하게 표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사천해전 장계에 ‘귀선 돌격장 이기남, 신의 군관 이언량’이라고만 적었다. 따라서 이기남과 이언량이 거북선에 같이 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방답귀선의 건조시기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사료가 전혀 없어 알 수 없지만 방답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본영 거북선이 시험 발사한 1592년 4월12일 이후에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5월 27일에 이언량이 방답 귀선을 몰고 출전하였다면, 이언량은 1차 해전에서 돌아온 5월9일부터 18일동안 거북선 시험운항과 함포사격 훈련을 했다는 것인데 이 기간은 너무나 짧다. 거북선 돌격장 이기남은 본영 거북선이 4월 12일에 함포 시험 사격까지 마쳤는데도 5월 4일의 1차 해전에 출전하지 않고 거북선 운항과 함포 훈련을 계속하였다.
셋째, 한산 해전에서 방답귀선 돌격장을 박이량이 맡은 점이다. 이언량이 사천해전에서 방답 귀선 돌격장을 했다면 한산 해전에서도 방답귀선 돌격장을 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한 척 출전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 논의는 한산 해전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
주1) 1910년 8월 경술국치 때 순국한 구례에 살았던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1855-1910)은 여수에서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보고 ‘충무공 거북선 노래’ 한시를 지었다.
(전략)
좌수영의 남쪽 문이 열리고
북소리 둥둥 울리며 거북선 나타나네
거북 같으나 거북이 아니며 배 같으나 배도 아니고
판옥 둥근 것이 고래 거품 뿜듯 헤쳐 나가누나.
(중략)
이충무공 같은 애국 명정이 있다면
나라 살릴 방책을 생각해 내리라.
거북선 만들어 이긴 그 묘한 지혜로 적과 맞선다면
왜놈들도 무릎 꿇게 할 것이고 서양 사람들도 멸할 것이다.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p 146-148 )
주2) 이민웅은 저서 ‘이순신 평전(2012년, p 168)’에서 한산해전에 3척의 거북선이 참전한 것으로 보았으나 2022년 8월 16일 국방일보 칼럼에서는 ‘좌수영(본영) 거북선과 방답 거북선 두 척만 참전했다’고 기술하여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필자의 견해는 한산해전에는 거북선 두 척이 출전했는데, 본영 귀선은 좌돌격장 이기남과 보인 이언량이 승선하고, 방답 귀선은 우돌격장 박이량이 승선하였다.
주3) 보인은 군(軍)에 직접 복무하지 아니하던 병역 의무자로 실제로 복무하는 대신에 베나 무명 따위를 나라에 바쳤다. 그런데 이순신이 이언량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1차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삼았고, 2차 해전에서도 참전케 하였다.
(참고문헌)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윤영수, 거북선 타고 장군의 바다로- 이순신, 거북선 그리고 사천해전, 사천문화재단, 2021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민웅,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역할과 활약, 국방일보, 2022.8.16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현석, 대굴포 전라도 수영 고찰
o 임기봉 편역, 이충무공 진중일기 1, 범우, 2007
o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
o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