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거북선에 대하여(1)
- 작성일
- 2022.09.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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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21회 거북선에 대하여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720만 명이 본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첫 장면에 사천해전이 나온다. 사천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이 거북선을 ‘복카이센( 전설 속 바다 괴물)’이라면서 두려움에 떤다. 일본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사천해전에서 파손된 일본 배를 보며 ‘충파(衝破)인가’라고 중얼거린다. 이어서 도끼를 든 거북선 돌격장 나대용이 거북선 등 위에서 일본 전함으로 달려가다가 총을 맞고, 이순신도 어깨에 총을 맞았다.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처녀 출전하였다. 이순신은 6월 14일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4곳에서 승첩을 아뢰는 장계(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에 대하여 보고하였다.(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47)
"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귀선을 만들었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의 머리를 달았고 입에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습니다. (前設龍頭 口放大砲 背植鐵尖)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서라도 쉽게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거북선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 속으로 돌진케 하여 천·지·현·황 등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 하였습니다. (今行 以爲突擊將所기 而先令 龜船 突進賊船中 先放天地玄黃各樣銃筒)
또한 1592년 5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도 거북선이 언급되어 있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대파시키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 사천해전을 말함)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先是, 舜臣大修戰備, 自以意造龜船) 거북선은 배 위에 판자를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其制船上鋪板如龜, 背上有十字細路, 纔容我人通行, 餘皆列揷刀·錐)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었고,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前作龍頭, 口爲銃穴, 後爲龜尾, 尾下有銃穴)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左右各有銃穴六, 藏兵其底, 四面發砲, 進退縱橫, 捷速如飛)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戰時覆以編茅, 使錐、刀不露, 賊超登, 則掐于錐、刀, 掩圍則火銃齊發。橫行賊船中, 我軍無所損, 而所向披靡, 以此常勝。 朝廷見舜臣捷報, 賞加嘉善)...”
거북선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의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도 언급되어 있다.
“공이 수영(水營 전라좌수영)에 계실 때에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싸움배(戰船)을 창작하였는데 크기는 판옥선만 하며 위를 판자로 덮었고, 판자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꽃아 사방으로 발디딜 곳이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였으며, 그 입은 총구멍이 되고, 뒤는 거북의 꼬리 처럼 되었는데 그 꼬리 밑에도 총구멍이 있었고 좌우로 각 6개씩 총구멍이 있었다. 그 모양은 대체로 거북 모습과 같았 때문에 이름을 거북선(귀선 龜船)이라 하였다.”(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4권, 2006, p 324)
이를 읽어보면 거북선 건조 이유와 거북선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거북선 건조 이유이다. 거북선은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한 배였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의 거북선보다 179년 빠른 1413년(태종 13년) 2월 5일자 ‘태종실록’에 나온다.
“임금(태종)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上過臨津渡, 觀龜船 倭船相戰之狀)
이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 ·조선 초에 거북선이 처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고려의 군선(軍船)인 과선(戈船)이다. 과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거북선과 비슷한 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415년(태종 15년) 7월 16일 자 ‘태종실록’에도 거북선이 등장한다.
“좌대언(左代言 병조판서) 탁신(卓愼)이 병비(兵備)에 대한 사의(事宜)를 올렸다.
첫째, 각 고을에서 성(城)을 단단히 쌓고, 봉화(烽火)를 갖추어 나라를 지키는 방도를 도모할 것.
둘째, 셋째 (생략)
넷째, 군기감(軍器監)의 화통(火㷁)이 이미 1만여 자루[柄]에 이르나, 각도의 성자(城子) 1백여 곳과 각 포(各 浦)의 병선 1백 60여 척과 산하(山河)의 험조(險阻)한 데 설비할 곳 등 그 쓰이는 것이 대단히 많아서 1만여 자루도 부족하니 추가로 제조할 것
다섯째, 병선(兵船)은 왜구(倭寇)가 오래 잠잠함으로 인하여 태만하고 해이해져 적을 제어하는 도구를 수리하지 않고, 화통(火㷁)·화약(火藥) 같은 것은 점화(點火)만 되면 해가 오래 되어도 쓸 수 있고, 배 위에서 또한 점화할 수 있으니 흙먼지가 끼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곰팡이가 끼고, 해가 오래되도록 쓰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각도 수군절제사로 하여금 일일이 점검하여 병조에 보고하게 하고 실하지 않은 것은 다시 갖추도록 할 것
여섯째, 거북선[龜船]의 방식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이길만한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도록 하여 전승(戰勝)의 전함으로 갖추게 하소서.
이때에 탁신(卓愼)이 병조를 맡았는데, 임금이 보고 병조에 내리었다.”
그런데 탁신의 건의대로 거북선이 조선 수군에 배치되었는지, 실제 전투에 사용되었는지는 기록은 전혀 없다.
한편 태종은 왜구 정벌을 위하여 수군 전력 강화에 힘썼고 전선의 수가 500여 척에 달하였다. 이후 세종은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이러함에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510년에 삼포왜란(三浦倭亂), 1544년에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1555년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잇달아 일어났다.
1544년 4월에 경남 통영 사량진에서 왜변이 일어났다.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 유택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명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는 판중추부사 송흠이
수군 개혁론을 상소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9월 8일)
송흠은 1) 중국의 당선(唐船)처럼 판옥선을 건조할 것 2) 무기와 화포등을 개량할 것 3)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은 건의 했다. 그런데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자 이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1555년(명종 10)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선박 70여 척으로 일시에 전라남도 달량포(達梁浦)로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고, 어란도(於蘭島)·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를 토벌하다가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화포(조총을 말하는 것 같다- 필자 주)로 무장하고 규모를 키운 일본 군선을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맹선(猛船)이 격퇴하지 못하자, 맹선 무용론이 다시 제기되었고 새로운 전투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하였다. 맹선들은 세조 때 군용과 조운(漕運)에 겸용하도록 만들어진 병조선(兵漕船)이어서 몸집이 우둔하고 기동력도 떨어져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다시 제기된 것이다.
이에 새로운 전투함 판옥선(板屋船)이 건조되었다. 종래의 맹선은 선체 안에 병사들이 발을 붙이고 싸울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에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는 평선(平船)인 데 반하여, 판옥선은
상장을 높게 2층으로 꾸며 노역을 전담하는 격군(格軍)과 전투에 임하는 군사를 갈라 놓았다. 뿐만 아니라 백병전에 능한 왜적이 선상에 기어올라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기동성이 좋고 견후장대하다는 점이다. 다만 단점도 있었다. 썰물 때에는 판옥선이 쉽게 돌진할 수 없다는 점, 지형이 좁고 암초 같은 것이 많을 때는 서로 부딪치게 되어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 둔중하고 속력이 느리다는 점, 병사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복되어 복원성에 결점이 있었다.
이럼에도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왜란에 대비하여 판옥선을 보완하고자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장갑판 윗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개판(蓋板)을 덮어 수군을 보호한 돌격선이었다.
둘째,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누구나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거북선을 설계하고 건조한 선박기술자는 나대용이다. 서울시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의 게시물을 읽어보자.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나대용은 장차 왜구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국방에 대한 대비책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조선(造船) 담당 장교로 임명하여 거북선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투함인 창선(槍船)을 창안하여 건조하였다. 남해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쾌속정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하기도 했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청백리 송흠, 온새미로, 2011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4권, 비봉출판사, 2006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이순신 지음 · 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조선시기 여수좌수영의 거북선,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