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거북선,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하다.
- 작성일
- 2022.09.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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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20회 거북선,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선조가 한양에서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비통했다. 5월 9일에 이순신 함대는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로 돌아왔다. 다음 날(5월 10일) 이순신은 침통한 상태에서 ‘옥포에서 왜군을 무찌른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장계는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로 시작하여,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의 전말이 자세히 적혀있다. 적진포에서 구출한 향화인 이신동, 옥포해전에서 구출한 14세 소녀의 심문 내용과 연해안 피난민의 사정도 적었다. 또한 노획물에 대하여도 적었다.
“왜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간 창고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며, ... 왜선에 실려 있었던 물건 중에 우리나라 쌀 300여 석(石)은 여러 전선의 굶주린 격군(格軍 노 젓는 수군)과 사부(射夫 활 쏘는 수군)들의 양식으로 적당히 나누어 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적을 무찌른 뒤에는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려는바, 아직은 그대로 두고 조정의 조치를 기다립니다.”
또한 이순신은 장계 말미에 왜적을 막는 방책에 대하여 언급한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오직 육전에서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진력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년 기업(基業)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적이 만약 뱃길로 본도를 침입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군사들은 전마(戰馬)가 한 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곶(여수시 화양면 백야리)과 흥양 도양장(고흥군 도양면 도덕리)에서 기르는 말(馬) 중에 전쟁에 쓸만한 말(馬)이 많으므로 이들을 차출하여 훈련시켜 전쟁에 사용한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의 독단으로 말씀드릴 일이 아님을 잘 압니다. 사태가 급하여 우선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이런 사연을 담은 공문을 보냈습니다.”
한편 ‘옥포 승첩’장계는 군관 송한련과 진무 김대수가 배편으로 서해안으로 올라가서 평양 조정에 전달되었다. 5월 23일 평양에서 이순신의 장계를 본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자하라고 명했다.
1592년 5월 23일의 ‘선조실록’이다.
“전라 수사 이순신은 주사(舟師 함선)를 동원해서 타도(他道)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논상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한편 5월 11일 이후 2차 출전한 5월 29일까지의 이순신의 활동은 ‘난중일기’에 나와 있지 않다. 물론 다른 자료에도 없다.
그렇지만 이순신과 전라좌수군이 어떤 준비를 했을지에 대하여는 당시 상황을 종합하여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이순신은 수군들에게 일단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초긴장 상태에서 10일간 장거리 항해를 하였고 옥포·합포·적진포 3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수군들에게 며칠간 쉬게 했다. 수군들은 쉬면서 고향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정찬주의 대하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 2’에는 나대용의 사촌 동생 나치용은 고향 나주로 특별휴가를 간 것으로 나와 있다.
둘째, 1차 해전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훈련을 실시했을 것이다.
휴가를 보낸 수군들이 귀대하자 이순신은 1차 해전에서 파악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셋째, 2차 해전을 위해 전선 정비와 각종 무기와 군량 준비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다행히 1차 출전에서 전선의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2차 출동을 위해 전선을 정비하고, 각종 무기와 군량 준비에 시간을 할애 했을 것이다.
넷째, 1차 출전에 참전하지 못한 거북선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4월12일에 화포 시험을 마친 전라좌수영 본영 거북선은 1차 해전 때 출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돌격장 이기남의 지휘아래 시험 운영과 함포훈련등을 실시했다. 이순신은 2차 출전 때는 거북선을 출전하도록 이기남을 가일층 독려했을 것이다. 아울러 돌산 방답진에서 만든 방답 거북선도 가동할 수 있도록 챙겼을 것이다. (이민웅, 이순신 평전, p 143-146)
한편 부산에 본거지를 둔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1차 출동으로 혼비백산 한 이후에도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함선을 이끌고 점점 거제도 서쪽으로 침범하여 연해안의 고을들을 분탕질하였다.
이런 소식이 여수에 있는 이순신에게 계속 전해졌다. 마침내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 함대 구성을 제안하면서 구체적인 출동 날자를 공문으로 보냈다.
“전라 우수영과 함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경상도의 적을 섬멸하려 합니다. 6월 3일까지 전라좌수영에 집결하여 함께 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5월 27일에 원균이 긴급 구원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일본 군선 10여 척이 벌써 사천과 곤양 등지로 육박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경상우수군의 전선들은 남해 노량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천과 곤양은 남해 접경이었고, 남해는 광양과 여수 인근이었다. 왜군이 전라좌수영 턱 밑까지 온 것이다.
이순신은 초조했다. 지체하다가는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순신은 6월 3일까지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이순신은 휘하의 함대만으로 곧 출전키로 하고, 전라좌수영을 지키는 유진장으로 군관 윤사공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을 전라좌수영 들머리인 흥양에서 전라좌수영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각 부서와 장수를 다음과 같이 임명했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1)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
우별도장 여도권관 김인영
한후장 전 군관 고안책·급제 송성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
구선 돌격장 급제 이기남 2)
5월 29일 새벽에 이순신은 판옥선 23척 3)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곧바로 뒤쫓아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윽고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때 원균은 하동 선창에 옮겨 있다가 단지 3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에서 합세하였다. 1차 때의 전선 4척보다 1척이 줄었던 것이다. 4)
이순신이 원균에게 적의 행방을 상세히 묻고 있을 때, 곤양 쪽에서 사천으로 왜선 1척이 달아나고 있었다. 연합함대가 뒤쫓아 가자 왜군은 상륙해 버렸다.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현령 기효근이 대포를 쏘아 왜선 1척을 불살랐다.
이 과정에서 사천 선창(사천시 읍남면 선진리성 부근)에 왜선 12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군 400여 명은 배를 정박시키고 지세가 험한 절벽 위에 뱀이 똬리를 뜰 듯 진(장사진 長蛇陣)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조류가 썰물이어서 판옥선이 개펄에 박힐 수도 있어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 함대는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썼다. 우리 함선이 뒤로 물러가자 왜군은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총을 쏘고 함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이럴 즈음에 조수가 밀물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로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이순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처음 출전한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작전을 펼쳤다. 거북선 돌격장(突擊將) 이기남이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 천·지·현·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니 일본 수군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였고, 뒤따른 전선들도 일제히 철환(鐵丸)과 장편전(長片箭) 천자·지자 총통 등을 쏘아 일본 대선 12척을 분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완은 소녀 1명을 구했고, 이응화는 왜군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왜군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울부짖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하였다. (이순신의 임진장초)
하지만 이순신 함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이순신 자신이 앞장서서 독전하다가 왼쪽 어깨에 총탄이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고, 대솔군관 훈련 봉사 나대용은 철환을 맞았고, 전 봉사 이설도 화살을 맞았으나 모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5)
5월 29일의 ‘난중일기’이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이 아니었다. 사부와 격군 가운데도 탄환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날이 저물자 조선함대는 배를 돌려 사천만 입구 쪽에 있는 모자랑 포에 정박하였다.
주1) 이순신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설득하여 순천부사 권준을 원대 복귀시켰다.
주2) 700만 명이 본 김한민 감독의 한산-용의 출현’영화 첫 부분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돌격장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훈련 봉사 나대용은 이순신의 대솔(帶率 높은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군관으로 이순신과 함께 지휘선을 탔다.
주3) 전라좌수영 함선이 1차 출전 시 24척보다 1척이 준 것은 송한련이 옥포 승첩 장계를 가지고 평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주4) 원균의 함선이 1차 출전 시 4척에서 3척으로 1척이 준 것은, 원균이 옥포 승전 보고를 위해 평양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주5) 사천해전에서 이순신·나대용·이설이 부상 당한 것은 이순신의 지휘선이 거북선의 위용을 확인하기 위해 너무 가까이 접근하다가 그랬을 것이다.
(참고문헌)
o 김성한, 7년 전쟁 3, 산천재, 2012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임기봉 편역, 이충무공 진중일기 1, 범우, 2007
o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o 정찬주 지음, 이순신의 7년 2, 작가정신, 2016
o 이순신 지음 · 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