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조선 수군,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하다.
- 작성일
- 2022.09.0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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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19회 조선 수군,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5월 7일 새벽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함대 판옥선 28척,협선 17척, 포작선 46척 등 총 91척은 송미포(松未浦: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에서 가덕도 쪽으로 출항했다. 왜군이 가덕도 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연합함대가 12시쯤 옥포(玉浦: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기전(神機箭 화약을 장치한 신호용 화살)을 쏘아 올렸다.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순신은 즉시 장수들에게 "명령 없이 망령되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고 태산처럼 무겁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라고 엄하게 명령했다. 자칫 장수들이 흥분하면 부하들을 사지(死地)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 수군의 전투 역량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합함대는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지어 옥포만의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옥포 선창에는 왜선 30여 척이 흩어져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큰 배(아다케부네)는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 주변으로는 대나무 장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기들은 어지러이 매달아 놓았는데, 깃발의 모양은 여러가지로서 모두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 따라 펄럭이어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일본 수군들은 함선에서 내려와 관청과 여염집등을 마구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피어오른 연기가 온통 뒤덮여 주변 산이 안 보일 정도였다.
조선 함대의 갑작스런 출현에 왜군들은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어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만 배를 몰았다.
이윽고 왜선 30척 중에서 6척이 선봉으로 달려 나왔다. 이러자 조선 함대는 동서로 포위하면서 총통과 활을 쏘기 시작했다. 왜군들도 조총을 쏘며 대응했지만, 조선 수군의 총통과 화살에 맞아 고꾸라지는 자와 물에 빠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조선 수군은 나머지 왜선들에 대하여도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 왜선 20척을 당파분멸(撞破 焚滅 배를 깨뜨리고 불태움) 시켰다.
이처럼 조선 수군이 왜선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사르자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살아남은 왜군들은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면 왜선 26척을 무찌른 내역을 살펴보자. 이는 5월 10일에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옥포 승첩 장계’에 적혀있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는 왜 대선 1척을 당파(撞破 포를 쏘아 배를 깨뜨림)하고 왜적의 머리 1급을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갑옷·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였다. (왜장이 누구인지는 우리 측 기록에는 안 나와 있다. 일본 측 기록에는 도도 다카도라로 추정하고 있다.)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 대선 1척을 당파하고 조선사람 포로 1명을 구했고,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왜 대선 2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왜 중선 2척과 소선 2척을,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 대선 1척을,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 대선 1척을, 유군장이며 발포가장인 이순신의 군관 훈련 봉사 나대용은 왜대선 2척을 총통과 불화살로 깨뜨렸다.
또한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 중선 2척,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 중선 1척, 사도진 군관 이춘은 왜 중선 1척, 순천대장(代將) 전 봉사 유섭은 왜 대선 1척을 당파하고 소녀 1명을 구출했으며, 한후장 영군관 최대성은 왜 대선 1척, 참퇴장 영군관 배응록은 왜 대선 1척을, 돌격장 영군관 이언량은 왜 대선 1척, 이순신의 대솔(帶率) 군관 변존서와 전 봉사 김효성이 힘을 합해 왜 대선 1척을 당파했다.
이리하여 전라좌수군은 왜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1척을 당파했고, 경상우수군은 왜선 5척을 당파했다.
연합함대의 피해는 전사자는 없었다. 단지 전라좌수군에 부상자 1명(순천부 정병 이선지), 경상우수군에 부상자 2명이었다. (경상우도 장수들이 전라좌수군이 이미 사로잡은 왜선을 향해 활을 쏘면서 빼앗으려다가 사부와 격군 2명이 상처를 입었다. 이순신은 원균이 부하 단속을 잘못하여 일어난 일이었다고 ‘옥포파왜병장’장계에 적었다.)
한편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 산으로 도망친 왜군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거제도의 산세가 워낙 험준하고 병력을 나눌 경우 왜군의 습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순신은 옥포에서 15km 떨어진 거제도 북쪽 끝의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에서 쉬기로 하고 북으로 항해하였다. 영등포에서 군졸들은 나무도 베고 물도 길어와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척후선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왜선 5척이 멀지 않는 바다를 지나갔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하여 이들을 추격했다. 이순신 함대가 한 두 시간 계속 추격하여 웅천 땅 합포(合浦) 앞바다 1)에 이르자, 다급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여 조총을 쏘았다.
이순신 함대는 포구 안으로 쳐들어가 왜선 5척을 분멸하였다. 사도 첨사 김완,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어영담 2)이 각각 왜 대선 1척을, 방답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전 첨사 이응화가 왜 소선 1척을, 이순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송희립·김효성·이설 등이 힘을 합하여 왜 대선 1척을 깨뜨려서 불살랐다.
이후 조선 연합함대는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藍浦, 창원시 합포구 구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5월 8일 아침 일찍, 연합함대는 진해(鎭海)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즉시 남포에서 출항하였다.
이순신은 주변을 수색하면서 저도(猪島)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赤珍浦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3)에 이르자 왜선 13척을 발견했다. 당시 왜군은 포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상륙하여 민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수군은 조선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 보고는 겁내어 산으로 올라갔다.
이에 낙안군수 신호는 순천부 대장(代將) 유섭과 힘을 합하여 왜대선 1척을, 순천부 소속 급제 박영남과 보인 김봉수 등이 왜 대선 1척을, 보성군수 김득광이 왜대선 1척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사도첨사 김완·녹도만호 정운이 각각 왜대선 1척을, 전 봉사 주몽용이 왜 중선 1척을 , 이순신의 대솔군관인 전 봉사 이설과 송희립 등이 왜 대선 2척을, 군관 이봉수가 왜 대선 1척을, 군관 송한련이 왜중선 1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다. 이처럼 이순신 함대는 대선 9척과 중선 2척등 모두 11척을 분멸(焚滅)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아침밥을 먹고 쉬려고 하는데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이신동이라는 자가 아기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므로 이순신은 작은 배로 그를 실어와서 왜군의 소행을 물었다. 이신동은 일본 수군의 약탈로 인해 가족과 헤어지게 된 사연을 눈물을 흘리면서 애절하게 말했다.
“어제 왜적들이 포구로 들이닥치더니 어염집에서 재물을 약탈하고는 모두 왜선으로 나르고 나눠 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바다에 베를 띄워 놓고는 소를 잡고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피리불고 노래했는데, 몰래 숨어 들어 보니 그 노래는 모두 본국(일본)의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에 밤새 술 마시며 놀던 왜적이 반수가량은 남아 배를 지키고, 반수 가량은 뭍으로 올라와 고성으로 향해 갔습니다. 제 어머니와 처자는 왜적으로 인하여 서로 헤어지게 되었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은 그 정상이 가련하고 적의 포로가 될 것이 염려스러워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향화인 이신동은 헤어진 가족을 찾겠다며 사양했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이신동의 말을 듣고는 더욱 분노하여 힘을 합하여 곧 천성·가덕·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선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지세가 좁고 얕아서 판옥선이 싸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아직 오지 않아 조선 함대의 세력이 아직도 위태로워 원균과 상의하여 기묘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때에 전라도 도사 최철견의 첩보가 도착했다. 선조 임금이 서울을 떠나 관서로 피난 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순신 이하 여러 장수들은 비통했다
이에 이순신은 배를 돌려 본영으로 향했다. 5월 9일 12시에 전라좌수군은 전라좌수영(여수)에 돌아왔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변란에 대비하라”고 타이르고 진을 파하였다.
5월 10일에 이순신은 옥포 승첩을 아뢰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1592년 5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 나루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일부를 읽어보자.
“언양 현감(彦陽縣監 광양 현감의 오기임) 어영담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운룡과 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대파시키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승보를 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한편 5월 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한양을 지키던 유도대장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이 달아난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는 의외의 사태로 고민에 빠졌다. 조선 국왕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일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선조는 어디로 간 것인가? 4월 30일에 도성을 빠져나온 선조는 개성을 거쳐 5월 7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주1) 웅천 땅 합포가 어디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봉수는 ‘이순신이 지킨 바다’에서 합포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민웅은 ‘이순신 평전’에서 진해시 원포동 학개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도 진해시 원포동 학개마을이라고 주장했다.
주2) 어영담(魚泳潭 1532 ~ 1594년 4월 9일)
어영담은 1532년 내금위(內禁衛) 소속의 적순부위(迪順副尉:정7품 무관) 어심(魚深)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이 어디인지는 불명이나 경상도 함안군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는 무예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여도진 수군만호(呂島鎭水軍萬戶:종4품)에 특채되었고, 1564년(명종 19) 식년시 무과에 급제했다. 진해 등 여러 진관(鎭管)의 막료(幕僚)로 있으면서 해로(海路)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양현감으로서 이순신의 휘하에서 수로 향도(水路嚮導)로 활약, 옥포해전과 합포 해전·당항포 해전·율포 해전 등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1594년 4월 9일 전염병에 걸려 한산도 통제영에서 별세했다.
이순신은 이 날의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이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2022년 개봉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배우 안성기가 어영담에 캐스팅되었다. 그는 작중 백전노장의 면모를 보여주며 전투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다.
주3) 적진포(赤珍浦)의 위치에 대해서는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 통영시 광도면의 안정만, 고성군 동해면의 적포만 등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오늘날은 고성군 거류면 일대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윤영수, 거북선 타고 장군의 바다로- 이순신, 거북선 그리고 사천해전, 사천문화재단, 2021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조성욱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