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순신, 조정으로부터 경상도 출전 명령서를 받다.
- 작성일
- 2022.08.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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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17회 이순신, 조정으로부터 경상도 출전 명령서를 받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이순신, 원균의 요청을 거절하다.
1592년 4월 20일에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원균은 율포만호 이영남을 보내 출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 명령이 없다며 원균의 요청을 거절했다. 주1)
먼저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가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사실 처음에는 대규모의 왜적이 상륙하자 원균은 그 형세가 너무 큰데 놀라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전선 1백여 척과 화포, 무기 등을 바다 속에 가라앉혔다. 그는 수하 비장 이영남과 이운룡 등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쳐서 곤양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왜군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1만여 명은 모두 달아났다.
이것을 본 비장 이영남이 간언하였다.
“공께서는 수군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신다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때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전라도에 원병을 요청하여 왜군과 한차례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거든 그때 도망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원균은 이를 쫒아 즉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각자 책임을 맡은 구역이 있는데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경상도로 출전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원균은 5,6 차례나 이영남을 보내어 간절히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했다. 이영남이 이순신에게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했다.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2015, 징비록, p143-144)
그런데 1592년 5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원균에게 간언한 이가
이영남이 아니라 이운룡이고, 이순신을 찾아간 이는 이영남으로 적혀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왜적들이 침입하여 오자 그 기세에 눌려서 도저히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함 100여척과 무기들을 모두 바다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도 해산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에 그는 홀로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을 데리고 남해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다가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지역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전라도, 충청도 지방에 이르는 요새지이니, 만일 이곳을 잃게 되면 곧바로 전라, 충청지방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수군이 흩어져 있기는 하나 그래도 다시 모아 영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전라도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원균은 그 계책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을 보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후략)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20번째 기사)
원균(元均 1540∽1597)은 27세인 1567년(선조 즉위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종성부사(鐘城府使)를 하였고 1591년 초에 전라좌수사에 임용되려다가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의 부친 원준량이 전라우수사, 경상좌수사, 경상좌병사,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한 무관으로 집안도 좋았다.
반면에 이순신(1545∽1598)은 원균보다 9년 늦은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부친 이정(李貞 1511∽1583)은 벼슬을 했는지도 정확히 알 수도 없는 위세 높은 집안이 아니었다.
김종대는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책에서 ‘조부 백록은 생원시를 거쳐 벼슬길로 나아갔으나 조광조 등 사림파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1591년 기묘사화를 즈음해 벼슬길이 막혔고, 자녀의 혼사를 치르면서 법을 어겼다 하여 억울한 참변을 당했다. 집안의 이 같은 일을 겪게 되자 그 아버지 이정은 스스로 결심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가난을 감수한 채 평민으로 지냈다.’고 적었다.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2012, p 30-31)
# 이순신, 조정으로부터 경상도 출정 명령서를 받다.
4월 26일에 이순신은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을 받았다. 4월 20일에 작성된 서장에는 “일본군의 후방 교란을 위해 신중하게 출전하되, 조정은 멀리서 지휘할 수 없으니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경상도에 공문을 보내 서로 의논하여 조치하라.”는 다소 애매한 명령이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일개 좌수사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가 어려우므로 전라 관찰사 이광, 전라방어사 곽영,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경상 관찰사 김수·경상우수사 원균에게도 경상도의 물길 사정과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한 약속장소와 적선의 수, 현재 정박하고 있는 곳 등 여러 가지 기밀을 급히 회답해 달라고 통보했다. 이어서 이순신은 각 관포에도 출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27일 새벽 4시에 선전관 조명이 가져온 좌부승지의 서장을 또 받았다. 그 서장은 23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원균의 장계를 본즉 각 관포의 수군을 이끌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라고 하니,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 리 밖이라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반드시 명령에 구애받지는 말라”
이는 전라좌수군의 경상도 출전 명령서였다. 이순신은 5관 5포에 4월 29일까지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명령하였다.
이어서 이순신은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장계’를 조정에 보냈다. 이는 ‘임진장초’에 수록되어 있다. (4월 23일부터 4월30일까지 난중일기는 빠져 있다.)
4월 29일 밤 12시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회신을 받았다.
“적선 500여 척이 경상도 연해를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경상우수영(거제도 소재)도 이미 점령되었습니다. 두 도가 합세하여 적선을 공격하면 상륙한 왜적들이 후방을 염려하여 사기가 떨어질 것이니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4월 30일 새벽4시에 출전하기로 하고 수군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중위장(주력부대 중간에서 부장들을 통솔하는 장수)방답첨사 이순신
(李純信, 1554~1611))
좌부장(좌측면을 맡는 장수) 낙안군수 신호
전부장(前部將 전방 부대장) 흥양현감 배흥립
중부장(中部將) 광양현감 어영담
유군장(遊軍將 기습 공격하는 유격부대장) 발포가장(假將:임시지휘관)이며 영군관(營軍官)인 훈련봉사 나대용 주2)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척후장(좌측 정찰부대장)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한후장(후방 경계부대장) 영군관 최대성
참퇴장(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부대장) 영군관 배응록
돌격장 (적의 진중에 뛰어들어 돌격전을 하는 지휘관) 영군관 이언량
이어서 이순신은 ‘4월 30일 새벽 4시에 출전할 예정이므로 경상우도 소속이면서 본영과 이웃하고 있는 진인 남해현 미조항·상주포·곡포·평산포 네 진의 현령·첨사·만호들에게 전선을 정비하여 중간까지 나와서 기다리라’는 비밀 공문을 4월 29일 새벽에 전령에게 주어 급히 보냈다.
그런데 29일 오후 2시경에 전령으로 보냈던 본영의 진무인 순천수군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 고을 성안의 관아와 민가들이 모조리 텅 비었고, 성안의 군사들이 왜적이 가까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가 버렸고 심지어 현령과 진장까지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망연자실했다. 더구나 남해가 비었다는 소문만으로 도망자가 두 명이나 생겼다. 이순신은 이들을 잡아와서 효수하여 군중(軍中)에게 보이게 함으로써 군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4월 30일 오후에 ‘경상도로 출전을 잠시 미루는 장계’를 조정에 급히 올렸다.
“경상도로 나아가 싸우는 사정이 급박하기는 하지만, 남해의 평산 등 네 진의 진장과 현령이 적의 얼굴도 보기 전에 먼저 달아나 버렸습니다. 전라좌수군은 경상도 물길을 잘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해 줄 배도 없고, 작전에 호응해줄 장수도 없으므로 가벼이 출동하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 더구나 전라좌수군 전선 30척 만으로는 세력이 약합니다. 전라관찰사 이광도 이런 사정을 알고 이미 전라우수사에게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라고 지시했으니, 전라우수군이 오면 함께 출전하겠습니다.”
이순신은 장계 뒷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 곧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 관찰사(이광)이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바, 신은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꺾으려고 하나, 한 지역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써 함부로 하기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해전에서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에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튼튼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을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금방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격(掩擊 뜻하지 아니하는 사이에 습격)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분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한 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 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 되고 못되는 것은 신이 미리 생각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이순신 저·조성욱 역, 임진장초, 1997, p 31)
주1) 이영남(李英男 1563~ 1598)은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으로 1584년에 별시(別試) 무과 병과(丙科) 제163위(位)로 급제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조방장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5년에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고, 1621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완도군 고금도 충무사(忠武祠)에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하여 배향되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2) 나대용은 4월 18일부터 발포 가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유군장 나대용의 직함은 ‘발포가장이며 영군관인 훈련봉사’로 매우 길다.
그런데 ‘나대용 약사(略史)’를 보면 나대용은 훈련 봉사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순신은 왜 ‘전 훈련봉사’라 하지 않고 ‘훈련봉사’라고 기재했을까?
한편 거북선이 첫출전한 5월 29일의 사천해전에서 이순신과 나대용·이설이 부상을 당했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너무 가까이 돌격한 것이다.
이때의 장계에도 이순신은 ‘나대용은 현직 훈련봉사, 이설은 전직 훈련봉사’로 기록하고 있다.
“접전할 때 적의 철환이 신의 왼편 어깨에 맞히고 등을 뚫었으나 부상에 이르지 않았으며, 신의 군관인 봉사 나대용도 철환을 맞았고 전 봉사 이설도 화살에 맞았으나 모두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순신 지음 ·조성도 역, 임진장초, 1984, p 48)
(참고문헌)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조성욱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www.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