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령을 포기한 신립, 탄금대에서 자결하다.
- 작성일
- 2022.08.1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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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15회 조령을 포기한 신립, 탄금대에서 자결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불길한 징조들
4월 20일에 삼도순변사 신립은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선조를 접견했다. 선조는 보검을 내리면서 전교했다.
“이일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
이윽고 선조가 “왜적이 어떠냐?”고 물으니 신립은 왜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선조는 “변협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라고 말했다.
신립이 나간 뒤에 선조는 “변협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이다. 내가 항상 그를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라고 했다. 이때 변협(1528~1590)이 죽은 지 2년이었다(이항복‘백사집’).
1555년(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선 60척이 전라도 장흥·강진을 노략질하고 해남 달량포까지 침입했다. 이러자 해남 현감 변협이 왜구를 물리쳤다. 1587년에 그는 전라우방어사가 돼 녹도·가리포의 왜구도 격퇴시켰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 시절에 함경도 종성에 쳐들어온 여진족 족장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친 맹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적과 싸운 적이 없었음에도 왜인을 왜노(倭奴)라고 가볍게 여겼다.
임진왜란 발발 12일 전인 1592년 4월 1일에 류성룡은 신립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류성룡이 조총을 지닌 왜적을 경계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새도 잡는다’는 조총(鳥銃)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온 신립은 빈청(賓廳)에 들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섬돌을 내려오는데 머리 위의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한편 신립은 용인에 이르러 “적세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하고 딱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장계를 보냈다. 그런데 장계에 서명(署名)을 빠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류성룡, ‘징비록’).
# 신립, 조령을 포기하다
4월 26일에 신립이 충주에 들어왔다. 충청도 여러 고을에 있는 군사들을 모으니 8천 명이었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과 함께 조령(鳥嶺 문경새재) 시찰에 나섰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김여물 : 아군의 수가 열세이고 적은 세력이 지극히 크니 교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령은 지형이 험한 곳으로 만약 굳게 지키지 아니하면 적이 곧 점령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령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양쪽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공격하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 공격을 당하지 못하겠다면 물러나서 한양을 호위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계책입니다.
이종장 : 벌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리할 듯합니다. 이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해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산란하게 만들어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은 생각이 달랐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벌판에서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진을 쳐야 한다.”
충주 단월역(丹月驛)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신립은 상주 전투에서 패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이일에게 왜적에 대해 묻자 이일이 말했다.
“이번의 왜적은 1570년 경오년과 1555년 을묘왜변과 견줄 게 아닙니다. 또 북쪽 오랑캐처럼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한양을 지키십시오.”
이러자 신립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패장이니 목 베어야 마땅하나 이번에 공을 세워 속죄하라.”
신립, 독선적이다. 종사관 김여물·충주목사 이종장과 상주에서 패한 이일의 의견을 아예 무시했다. 신립은 조령을 버리고 단월역에 진을 쳤다.
신경은 ‘재조번 방지(再造藩邦志)’에서 조령을 안 지킨 신립에 대하여 이런 시를 남겼다.
험한 산길 구름 위에 닿아 날카로운 칼문 같은데 鳥道干雲似檢問
낭떠러지에 매달린 나무, 가지 잡기도 두렵네. 緣崖攀木怵心魂
장군이 험한 곳 버려 좋은 계책 못 썼으니 將軍棄險無良策
헛되이 사람들 전사시켜 귀신 되게 하였네. 徒使諸人化鵠猿
고니시의 왜군 1만 8천명은 4월 25일에 상주에서 이일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26일에 문경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기슭으로 피해 갔는데 적이 쫓아가서 항복하라고 했다. 신길원이 분연히 꾸짖고 굴하지 않으니 적이 그의 사지를 잘라 죽였다.
고니시는 처음에 조령(문경 새재)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山勢)를 보고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여러 차례 정찰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한 명도 없음을 알자 좋아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나중에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다가 이런 험한 곳을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申摠兵 신립)은 지모가 없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19번째 기사,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2014, p 84)
# 순찰 군관을 목 베다니
4월 27일 밤에 순찰을 나간 군관 한 사람이 적병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신립이 홀연히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웠는데 신립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 신립은 몰래 객사(客舍)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순찰 군관이 망언해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며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조리돌렸다.
순찰 군관의 목을 벤 신립. 총대장으로서 정탐을 전혀 모르니 너무 어리석다.
이윽고 신립은 적병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는 고니시의 왜군이 10리 가까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신립,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다.
4월 28일에 신립은 달천(㺚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가야 출신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그곳은 좌우로 논이 많고 물풀이 뒤섞여 있었고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말이 달리기에 불편했다.
이를 본 광흥주부(廣興主簿) 이운룡이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울며 말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신립은 “망령된 말로 일을 그르친다”며 곤장 30대를 쳤다. 이운룡은 흐르는 피를 씻은 뒤 전투대열에 합류했는데 군사가 패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
종사관 김여물도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편지를 썼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이르는 사람이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그는 또 집안에도 편지를 썼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가족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계시는 곳)로 달려가고 다른 곳으로는 피난하지 말도록 하라.”
김여물은 편지를 종에게 주어 집안에 전하게 했는데 이미 왜적이 사방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4월 28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단월역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달천 벌판에 조선군이 배수진을 쳤다는 첩보를 접하고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고니시가 7천명으로 중앙군을 맡고, 소 요시토시가 5천명으로 좌군, 시게노부는 3천명으로 우군을 맡았다. 후방은 하리노부가 맡았다.
# 기병과 보병의 싸움
고니시의 왜군은 충주 땅에 들어오면서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정오경에 그들은 탄금대로 내달아 삼면을 완전히 포위했다.
전투에 앞서서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선조에게 보낼 장계를 작성토록 했다. 왜적을 눈앞에 두고 보고서를 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조선군과 왜군은 달천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립의 군대는 8천명, 고니시는 1만 5천명이었는데, 두 지휘관의 전술은 달랐다.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고니시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다.
# 왜군의 전술에 당한 신립
먼저 신립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 1천명이 돌격했다. 왜군은 조선군의 활에 맞고, 말에 짓밟혀 죽었다. 고니시의 중앙군이 밀린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신립은 2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2천명의 기마대가 돌격해 나갔다. 왜군은 둘로 갈라져 단월역 쪽으로 잠시 후퇴하다가 곧이어 달천강을 따라 아래에서 쳐들어온 좌군(左軍)과 산을 돌아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넌 우군(右軍)이 합류했다.
소 요시토시의 좌군 조총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3열 연속으로 총을 쏘며 전진했고, 우군도 가세했다. 게다가 조선군의 말이 습지에 빠져 허덕이자 조총의 표적이 환히 드러났고, 말과 병사가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왜적의 총소리는 땅을 뒤흔들었고, 조선군의 쌓인 송장이 산과 같았다.
신립은 어쩔 줄 모르다가 혼자서 말을 타고 두 번이나 적진으로 쳐들어갔으나 전진할 수 없었다. 신립이 도로 강가로 달려오는데 마침 김여물이 여울 앞에 있었다. 신립은 김여물을 부르면서 “그대는 살기를 원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여물이 웃으며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요?” 하고 도로 탄금대 밑으로 달려가 신립과 더불어 왜적 수십명을 죽였다. 이때 왜적들이 바짝 추격해오니 두 사람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은 46세, 김여물은 44세였다. (신경, ‘재조번방지’)
한편 이일은 동쪽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도망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 도성에 가서 치계(馳啓)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망연자실이었다.
탄금대 전투는 기병대 보병, 말과 조총의 대결이었는데 왜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왜군 종군 승려 덴케이는 ‘서정(西征)일기’에 “왜군은 3천개의 수급을 취했고 수백명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했다.
한편 조선군 대군이 온 것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충주의 백성들과 관속(官屬)들은 다른 고을보다 심하게 죽음을 당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18번째 기사)
이로써 조선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갔다.
# 신립의 패인(敗因)은 오만과 무지
신립의 패인은 오만과 무지이다. 부하의 의견들을 아예 무시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왜군을 하찮게 보았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신립은 날쌔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있었지만, 계책과 계략에는 서툴렀다. 옛사람이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만 훗날을 위해 경계(警戒)로 삼아야 할 일이기에 여기에 덧붙여 써 둘 따름이다.”(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2014, p 85)
(참고문헌)
o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o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산천재, 2012
o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5
o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고전종합DB, 연려실기술,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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