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조는 안보 불감증
- 작성일
- 2022.08.1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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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14회 선조는 안보 불감증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선조는 안보 불감증
왜적이 부산에 쳐들어 온지 5일째 되는 4월 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한양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첫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
그런데 박홍의 보고는 엉성했다.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 차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
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 창덕궁 희정당 앞 매점이 빈청이었다.)에 모여 선조를 직접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선조는 무슨 영문인지 대신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대신들은 문서로 보고를 했다. 비대면 보고를 받은 선조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부지역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동부지역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서부지역으로 내려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을, 변기를 조방장으로 조령(鳥嶺 ‘문경 새재’로 더 친숙함,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사이)을 지키게 하고, 경주부윤 윤인함이 겁많고 유약하다하여 친상(親喪)중에 있는 전 강계부사 변응성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병력이 없어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한편 선조는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즉시 잡아 오라 하였다. 1591년 3월에 선조가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할 때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아뢴 정사(正使) 황윤길과 달리, 부사(副使) 김성일은 ‘왜적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아뢰어 그 죄를 묻고자 함이었다.
# 군사 300명도 선발 못 한 나라
18일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도착했고, 여러 고을이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연달았다. 이러자 한양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3백 명의 군사도 못 구해 3일이 지나도록 한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일 혼자서 먼저 떠나도록 하고, 별장 유옥이 군사를 모집하여 뒤따라가도록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7일)
당초에 이일은 정예병 3백 명을 데려가려고 병조의 ‘군사 선발 장부’를 입수하여 살펴보니 시정잡배와 서리(胥吏)·유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임시 점검했더니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 과거시험 답안지 종이)을 들고 있는 유생들과 평정건(平頂巾 관청 서리가 쓰는 두건)을 쓰고 있는 서리(말단관리)들이 거의 전부였다. 게다가 오합지졸인 이들은 징병을 면제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2009, p 56 )
# 삼도순변사 신립, 남쪽으로 향하다.
18일에 선조는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경질했다. 홍여순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어서 선조는 류성룡을 장수들의 감독과 격려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삼았다.
20일에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제수하고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참(斬)하라.”
이윽고 선조는 1591년에 서인 정철 일당(一黨)으로 몰려 의금부에 갇힌 전(前) 의주목사 김여물을 석방하여 신립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신립과 군사 수백명이 출정하자 도성 사람들은 시장 문을 닫고 지켜보았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
백성들은 1583년에 함경도에서 이탕개의 난을 진압한 신립이 이번에도 왜적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신성군의 장인인 신립은 매우 오만불손했다.
임진왜란 12일 전인 4월 1일에 신립을 만난 류성룡이 조총을 지닌 왜적을 경계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새도 잡는다.’는 조총(鳥銃)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록’)
# 왜군 3로(三路)로 북상(北上)하다.
한편 4월 15일에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 제1군 1만8천 명은 고니시 유기나카의 지휘 아래 양산-밀양-상주-조령-충주-용인-한양을 잇는 중로(中路)로 북상하였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2군 2만2천8백명이 부산에 상륙하여 양산-울산-경주-죽령-원주-여주-한양을 잇는 동로(東路)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4월 19일에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 1만 1천명이 안골포에 상륙하여 김해-성주-김천-추풍령-영동 –청주-한양을 잇는 서로(西路)로 북상했다.
4월 20일에는 모리 요시나리의 제4군은 김해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제5군과 고바야카와 다카가케의 제6군, 모리 데루모토의 제7군은 부산에 상륙했다.
#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전란 소식을 듣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4월 15일 해 질 무렵에 전란 소식을 알았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4월 15일
해 질 무렵 경상우수사(원균)가 통첩을 보냈는데, “왜선 90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하였다.
같은 시각에 경상좌수사(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곧장 장계를 띄우고 전라도 순찰사(이광)와 전라병마사(최원), 전라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경상순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4월 16일
이경(二更 밤 10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三道)에 공문을 보냈다.
4월 17일
궂은 비가 오더니 늦게 갰다. 경상우병마사 김성일이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후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다.
늦게 활 5순 (25 발)을 쏘았다.
4월 18일
아침 일찍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순찰사 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고흥군 소재) 권관이 이미 파직되어 떠났으니 임시지휘관을 곧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즉시 군관 나대용을 발포가장(假將 임시지휘관)으로 바로 정하여 보냈다. (발포권관은 1592년 2월 8일에 부임하였는데, 3월 23일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발포권관은 군사를 거느릴 재목이 못되니 알아서 조치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아직은 바꾸지 않겠다고 답장을 했다. 4월 18일에 이순신이 나대용을 발포 임시지휘관으로 보낸 것은 임명한 것은 거북선을 만든 데 대한 공로로 생각되는데, 어떤 책은 발포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라고 나대용을 발포가장으로 보냈다고 적혀 있다.)
오후 2시경에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었고, 양산(양산군수 조영규)과 울산 두 수령도 조방장으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고 했다. 분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경상좌병사(이각)와 경상수사(박홍)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곧바로 되돌아왔다고 하니 더욱 더 원통하였다.
4월 20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공문이 왔다.
“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무인지경에 들어 온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조정에 장계로 요청했다.”고 하였다.
이날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이 경상도로 출전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 경상도 수령과 군사들은 도망가고
한편 순변사 이일(1538∼1601)이 경상도로 파견되자, 경상 감사 김수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 작전 지역에 군사들이 모이면 중앙에서 온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군사작전을 편다)에 의거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각자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모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령 밑의 문경 이하 수령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노숙하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순변사 이일을 사흘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순변사 이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벌판에 모인 농민들이 동요하였다. 게다가 큰비가 내리고 군량도 떨어지니 이들은 밤중에 흩어져 버렸다. 이를 본 수령들도 말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
이처럼 대구 사수가 무산(霧散)된 것은 순변사 이일이 군사 300명도 못 뽑아 서울에서 3일을 허비하고 20일에야 출발한 탓이었다.
8월 21일에 이일은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고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급히 장계를 올렸다.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 60명에게 먹이고 23일에 상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역참에 나갔다가 그 길로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만 혼자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권길을 책망하고 뜰에서 목을 베려 했다. 이러자 권길은 군사를 불러 모으겠다고 애원하고는 밤새도록 촌락을 돌아다니며 농민 수백 명을 끌어모아 24일 아침에야 돌아왔다.
이윽고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았다. 곡식을 받으려고 산골에서부터 하나둘씩 백성들이 모여드니 수백 명이 되었다. 이리저리 모인 군사는 모두 8, 9백 명이었는데 이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6천 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지나치게 군사를 부풀린 것이다.
# 척후(斥候)도 안 세우다니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이미 선산(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김천시 개령면) 사람이 와서 왜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은 그가 유언비어로 군사들을 현혹시킨다고 노하면서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리게 하였다. 적을 정탐(偵探)하는 일은 병법(兵法)의 기본 중 기본인데 척후(斥候)도 안 세운 이일. 게다가 왜적의 낌새를 알린 백성마저 참(斬)했으니 정말 한심하다.
4월 24일 밤에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상주 남쪽 20리 되는 장천(長川) 냇가에 진을 쳤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척후(斥候)를 아예 안 세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방의 여진족을 무찌른 명장치고는 병법이 너무 졸렬하다.
“척후는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말은 옛날에도 못 들었다.” (조경남 ‘난중잡록’)
# 이일, 상주에서 패전하다.
25일에 이일은 상주에서 모은 농민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군사 8, 9백명으로 북천(北川) 냇가에서 진법을 훈련했다.
산세를 따라 진을 치고 진 한 가운데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큰 깃발 아래에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이일이 자리했으며, 종사관 박호와 윤섬, 판관 권길과 찰방 김종무 등은 말에서 내린 채로 이일의 뒤에 죽 늘어섰다.
얼마 뒤에 여러 명이 두셋씩 짝을 지어 숲속을 나와 배회하며 이일의 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왜군의 척후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밤에 개령 사람이 참수된 지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야 이일은 군관 박정호 등을 시켜 정탐하게 했다.
그런데 왜군이 숲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군관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박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그의 머리가 사라진 것을 본 우리 군사들은 기가 꺾일 대로 꺾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의 대부대가 집결해 조총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즉사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재촉해 활을 쏘게 했지만, 아군이 쏜 화살은 겨우 수십 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이일의 종사관 박호와 윤섬, 방어사의 종사관 병조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고 군사들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박호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로 나이 22세였다.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왜군이 추격해 오자 말을 버리고 갑옷도 벗어 던졌다. 왜군이 계속 쫓아오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가까스로 문경에 이른 이일은 급히 패전 상황을 조정에 보고 했다. 그리고는 후퇴하여 조령을 지키려 하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충주로 달려갔다. (류성룡,‘징비록’)
이처럼 4월 25일에 순변사 이일은 패하여 도주하였다.
4월 17일의 ‘선조실록’엔 이일의 패전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변경의 보고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로 순변사를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종사관 박호·윤섬 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 상주 전투의 패인
상주 전투의 패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일은 왜적을 너무 몰랐다. 왜군의 병력, 기량이나 동태를 너무 몰랐다.
반면에 왜군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벌판에서 훈련받고 있는 조선군을 기습했다. 전투는 하나 마나였다. 조선군은 9백명인데 왜군은 1만명으로 11배나 많았고,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안 해 본 농민인데, 왜군은 100년 가까운 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며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조선군)와 프로(왜군)의 싸움이었다. 게다가 포르투갈에서 온 왜군의 신무기 조총(鳥銃)은 조선의 활을 압도했다.
오죽했으면 ‘무데뽀(無鐵砲 아무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실렸을까?
그런데 이런 일은 3일 뒤인 4월 28일의 탄금대 전투에서도 똑같이 반복됐다.
( 참고문헌 )
o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o 김성한, 7년 전쟁 2권 전쟁의 설계도, 산천재, 2012
o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2인 역해,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5
o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o 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을유문화사, 2014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고전종합DB, 연려실기술, 난중잡록,재조번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