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본 사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에 두 차례 오다
- 작성일
- 2022.07.11 16:32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230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5회 일본 사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에 두 차례 오다
김세곤 지음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1차 사신 : 다치바나 야스히로
1587년 9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의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 귤강광)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사(國使)로 조선에 왔다. 손죽도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 히데요시가 규슈를 평정한 지 4개월 뒤 였다.
히데요시는 "우리 사신은 매양 조선에 갔으나 조선의 사신은 오지 아니하니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야스히로를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서신중에 ‘이제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참으로 오만불손했다.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50세 남짓으로 체격이 컸으며 수염과 머리칼은 반백이었다. 그런데 그는 행동이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자주 조롱하였다.
부산을 지나 인동(仁同 경북 칠곡군)을 지나다가 창을 잡은 군졸을 깔보듯이 말했다.
“너희들 창 자루가 너무 짧구나.”
상주에선 목사 송응형이 접대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시켜 목사를 조롱하였다.
“나는 수년간 싸움터에 있어 머리털이 세었거니와 목사께서는 기생들의 춤과 노래 속에 파묻혀 걱정 없이 지냈는데도 어찌해서 머리털이 희어졌소?”
서울에선 예조가 주관한 연회에서 야스히로는 일부러 호초(胡椒 후추, 인도 남부에서 생산된 세계에서 가장 입맛을 돋우는 값비싼 향신료)를 자리 위에 몇 주먹 흩뜨렸다. 이러자 거문고를 타던 악공, 춤추고 노래하던 기생할 것 없이 앞다투어 후추를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스히로는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이 무너졌구나.”라고 말했다.
조선 조정은 히데요시에게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서를 보내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비롯한 그 일족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 3번째 기사 ; 유성룡 저·김문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p 30-33)
# 2차 사신 : 외교승 현소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1589년 3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에게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명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1588년 12월에 소 요시시게가 죽자 대마도주를 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다. 요시토시는 원래는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다리오(Dario)이고 아내는 고니시 마리아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바닷길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통신사를 거절하자, 간사한 꾀를 내어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주의 아들이기에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면 길을 잃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도는 조선이 사신 보내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조선의 허실(虛實)을 엿보고자 함이었다.
6월 하순에 소 요시토시는 하카타 성복사의 승려 현소(玄蘇)를 정사(正使)로 자신이 부사(副使)가 되어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하카타 상인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 25명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현소는 1580년에도 일본 국왕 사절로 조선에 온 적이 있는 외교승이었다.)
조선은 선위사 이덕형이 일본 사신을 맞이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공작새 1쌍과 조총 여러 정을 바쳤는데, 선조는 공작새는 남양(南陽) 해도(海島)로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 병참사령부)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선조수정실록 1589년 7월 1일)
그런데 조총에 대한 무관심은 선조나 무관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류성룡은 장계를 올려 훈련부정(訓鍊副正) 이봉(李鳳)으로 서울의 상번군사(上番軍士)를 통솔하여 조총 쏘는 법을 훈련시키도록 간청하였는데, 관계자들이 다 헛된 일로 생각하여 흐지부지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DB/서애선생문집 제16권/잡저(雜著)/ 임진년(1592년) 일의 시말(始末)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임)
8월 1일에 일본 사절이 서울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선조는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1일 2번째 기사)
석강(夕講)을 마치자 선조가 포도대장 변협(邊協 1528~1590)에게 을묘왜변을 화제로 꺼냈다. 을묘왜변은 명종때인 1555년에 왜적이 6천여명이 70척의 배로 전라도 일대를 침입했던 사건을 말한다. 변협은 을묘해변 때 해남군수로 왜적 방어에 참여했다.
선조 : "지난 을묘년(1555년)에 왜적이 얼마나 되었는가?"
변협 : "배 70척에 군사가 약 6천 명쯤 되었습니다."
선조 : "수만 명이 쳐들어올 기세는 보이지 않던가?"
변협 : "왜선(倭船)은 그다지 크지 아니하여 중국 배에 미치지 못하므로 한 척에 1백 명밖에 실을 수 없습니다. 1백 척이면 1만 명이니 1만 명밖에는 더 나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선조는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일본이 서둘러 조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변협에게 물었다.
변협은 두 가지 개연성을 언급했다.
변협 : "남의 역량(조선)을 빌어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에 일을 꾸미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조 : "이쪽에서 통신사(通信使)는 절대 보내지 말고, 두둑한 선물로써 회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변협 : "의장(衣章) 같은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조 : "그들을 접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변협 : "이미 서계(書契)로써 서로 통하였으니, 접견하신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궐내(闕內)에 잔치를 베풀어 먼 데 사람을 포용하시는 도량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조는 평시(平時)에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지금은 히데요시가 자기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므로 통신사를 보내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경연관 허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성은 통사를 파견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긴다고 아뢰었다. 그 근거는 거절할 경우 예상되는 히데요시의 전쟁 도발과 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들었다.
8월 4일에 선조는 교린책에 대해 조정 대신·비변사·제조가 의논하라고 도승지 조인후에게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4일)
선조가 제시한 의논 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587년 손죽도 왜변을 일으킨 왜구 주모자들과 향도 사화을동의 압송, 둘째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쇄환이었다. 아무 조건 없는 통신사 파견은 명분이 없으므로 일본이 거기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은 위 내용을 동평관 관리를 통해 일본 사신에게 전달했는데, 예상외로 소 요시토시가 쉽게 응했다. 그는 가신 시게노부를 다시 일본으로 보내 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이러자 선조는 8월 28일에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일본 사신을 접견하고 술을 내렸다. 일본 사신들이 ‘천세(千歲) 천세(千歲)’를 외치자 선조는 매우 흡족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8월 28일 1번째 기사)
이윽고 소 요시토시는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김대기·공대원 등 1백 16인과 반역자 사화을동 및 손죽도 사건의 적왜(賊倭) 긴시요라(緊時要羅)·삼보라(三甫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 3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면서 "왜구가 쳐들어간 일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귀국의 반역자 사화을동이 오도(五島)의 왜인을 유인하여 변보(邊堡)를 약탈한 것이므로 지금 잡아 보내니 귀국의 처치를 기다립니다."하고, 조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통신사 파견의 최종 결정은 9월 21일에 내려졌다.
“좌상 이산해, 우상 정언신이 입궐하여 면대(面對)를 청하자 즉시 인견하였는데, 일본에 보낼 통신사에 관한 문제였다. 선조가 종2품 이상을 불러 인견하고 제각기 소견을 아뢰도록 하니 모두가 통신사 보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였으나 이산보만 불가하다고 하였다. 선조는 조정의 논의에 따라 통신사를 보내도록 하였다(선조실록 1589년 9월 21일)
선조의 통신사 파견 결정은 우호적인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월에 정여립 사건이 터졌다. 기축옥사로 통신사 임명이 지체되다가 선조는 11월 18일에야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였다. (선조실록 1589년 11월 18일)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 허균의 형이며 동인의 영수 초당 허엽의 아들인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헌부례(獻俘禮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1587년 손죽도 사건을 일으켰던 왜구 긴시요라등 3명과 왜구 향도(嚮導)노릇을 한 어부 사을화동(沙乙火同)이었다. 왜구들과 사을화동은 도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3월 6일에 황윤길, 김성일, 허성, 무관 황진등 2백 명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 사신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했다.
한편 함경도 길주에서 귀양 중인 조헌은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과 통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
그는 통신사 파견은 집권한 간신들이 우리 스스로의 힘을 망각하고 왜의 협박을 두려워한 결과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은 일개 통신사 파견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천의 지형ㆍ지세와 도로의 원근(遠近)을 알아서 우리나라의 땅을 유린하자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성을 굳게 지켜 스스로 힘을 다해야 한다고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그러나 조정은 조헌의 주장을 ‘미친 소리’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현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의 방비 상태와 조선 대신들의 생각, 민심 동향, 산천 도로 등 지리의 세세한 사항을 낱낱이 살피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 일본 밀정은 조선 팔도를 돌아나니며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밀정 가운데는 사절단 수행원도 포함되었으나 장사꾼과 왜구, 심지어 포섭한 조선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현소는 세밀한 조선 지도를 여러 장 작성해 놓고 있었다.
* 참고로 류성룡의 ‘징비록’은 1604년에, ‘선조실록’은 북인에 의해 1610년(광해군 2년)에,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에 의해 1657년(효종 8년)에 완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