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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의 옥천의병군이 금산에서 전멸하고, 순화군과 임해군이 함경도에서 왜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은 충격적 비보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율과 황진의 관군이 배티재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은 낭보다. 특히 김천일 의병장이 독산성전투와 금령역전투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품계를 거듭 올려서 제수 받은 것과 창의사의 권한을 도원수급으로 한다는 선조의 교지는 자랑스럽다. 이는 김천일 선생이 평소 부하들의 호를 불러주는 친근함과 깊은 정으로 장졸들이 단결한 결과가 아닌가. 김천일 선생은 이런 영광을 "나는 장수의 재능이 없는 일개 서생일 뿐이다"라면서 의병군들의 공으로 돌리는 겸손함이 돋보였다.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관군이 전쟁에서 연일 패하자 조정이 의병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광해군이 행궁으로부터 내려온 지시라며 첨지중추부사 겸 방어사의 직책을 내리니, 국가로부터 공식 직위를 인정받은 김천일 의병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백배 했을 듯 합니다. 관군과의 갈등에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다행스럽습니다. 그리고 선조도 도원수급인 창의사의 군호를 내리네요. 군주로부터 그 지위를 확실하게 인정받은 김천일 의병군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성한 것은 쇠하고 쇠한 것은 성한다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어 어릴 때 뛰어놀던 학교 앞 은행나무 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20세기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처럼 팍스아메리카나를 구현했던 United States Of America도 대제국의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가는 지 민주주의의 기둥뿌리가 흔들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한 인물을 평가할 때 너무 높은 신전에 올려놓고 보면 그 인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간디, 호치민은 물론이려니와 미국인 들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링컨조차 그 이면에는 비열한 협잡꾼의 면모를 보인 적이 많다. 성웅 이순신마저도 난중일기에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험담하는 걸 볼 수 있다. 개혁 군주로 평가 받고 조선의 왕들 중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한 군주 중 한 명인 정조 또한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신하를 매우 심하게 욕하는 편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운동도 예술도 공부도 능력이듯 정치도 인격과는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 자질인지도 모르겠다. 축구 신동 마라도나가 인성이 개차반이듯 말이다. 1589년 선조는 세력이 너무 커진 동인들을 기축옥사를 계기로 정철 등을 앞세워 숙청하였다. 이발, 최영경, 정언신 등이 이때 희생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잠시 집권을 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건저문제로 다시 동인들이 집권하였다. 이런 와중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이하였다.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 정철과 친분이 있는 서인들은 국난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받은 서인 세력들이 많은 기호(경기, 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목숨 걸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관의 무력함인지 비협조인지 유학자로써 역량부족인지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겹쳐 고경명, 조헌 등이 순절하고 만다. 그런 중에도 김천일은 금릉 전투 등에서 승리하고 강화도로 옮겨 관과 힘을 합쳐 다음의 큰 싸움을 대비하는 모습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경명, 조헌 등의 사례는 훗날 동인(북인)들의 근거지인 진주성 싸움에서 김천일 등의 순절을 예고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아베의 일본이 쳐들어 왔을 때 전라도 의병들이 경상도로 갔을 때 그쪽 지방관들이 협력하여 공을 넘겨줄 것 같지도 않고, 반대로 시진핑의 중국이 쳐들어 왔을 때 전라도 지방관들 또한 화합하여 경상도 의병들에게 힘을 모아줄 것 같지 않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는 정권다툼에 날이 새고 관료제는 폐해가 극에 달하여 규제를 남발 민간 부문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은 4류 정치와는 별개로 세계적 기업들과 젊은 과학자 문화예술인 스포츠인 등이 있어 그나마 조금은 희망이 있는 것 같다.
23회 행궁과 분조 편은 의병장 김천일 대장의 인품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전라 병사 최원도 김천일을 흠모하고 병사들도 존경하고 따른다. 그러나 본인을 서생이라고표현하고 있다. 선조는 온몸으로 충성하는 김천일에게 장예원 판결사를 제수하고 창의사란 군호를 내린다. 무한한 신뢰이다. 이번 기회에 김천일 의병장을 재조명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나주 시청 공무원의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작가님의 노력에 감사함을 다시 한번 표한다. 감사합니다
임환이 앞서 광해군에 안전한 곳인 이천으로 남진하시라고 간청한 후 옮겼다는 소식에 김천일은 반가워 임환에게 공을 치하한다. 김천일은 왕세자의 분조를 향해 수시로 전황을 보고해 드리기 위해 위험한 일이지만 자기 자식인 상건에게 그 임무를 부여한다. 전라병사 최원과 나주의병들 중 목수출신을 차출하여 버려진 전선 등을 수리하게 하고 나주의병과 함께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도록 협의한다. 김천일은 참모 장수들을 모아놓고 최원과 합의한 내용을 참모들에게 알리며 각자의 임무를 명한다. 광해군을 알현하고 돌아온 김상건은 임금님께서 김천일에 내린 벼슬을 첨지중추부사 이자 방어사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는 소식을 의병들에게 알리니 나주의병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른다. 김천일은 겸손하게 자기혼자 잘해서 전공을 세우는게 아니고 나주의병 여러분들의 충의로 목숨을 받쳐 싸운 결과라 하며 공을 의병들에게 돌리는 그 인품...! 양산숙과 곽현은 선조임금께 독성산성의 승전과 용인 금령역 왜적을 야간에 기습하여 왜적 수급 열 다섯개를 얻었다는 전과를 올렸음을 아뢰며 김천일의 장계를 올리니 또다시 선조 임금이 나주의병에 대해 찬사를 하며 김천일에게 장예원 판결사를 제수하고 창의사란 군호를 내린다. 이와 같은 나주의병의 전과는 김천일의 군사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사랑속에 의병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워 주는 그 인간적인 면모와 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예리한 판단력으로 통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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