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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과 큰아들 김상건은 왜적들에게 부산진성,다대진성,동래성을 내어주고 말았다는 비보를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김천일은 평소 왜적들의 침략을 예견하고 꾸준히 검술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양씨부인 또한 이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쬐끔씩 모으는 등 머잖아 왜적과 한판 결사항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멋진 승리를 기대해 본다."천지신명이여, 왜적들을 바다 밖으로 쓸어주소서! 천지신명이시여."
전력의 열세에도 결사항전하는 조선의 장수와 군사들. 나라의 은혜를 갚는데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그들의 충정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배가 고프다믄 무신 재주로 싸우겄는게라우." 왜적의 침략에 대비해 빈 창고에 양곡을 모았다는 양씨부인의 지략 또한 대단하다. 궁한 살림에도 날마다 절식해 모았을 그 인내가 예삿일이 아니다. 김천일과 함께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한 양산숙, 그는 기묘명현 양팽손의 손자이다. 훗날 이순신의 재기를 도운 양산항과 종형제간이니 대대로 충신이자 의기로 가득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한 가문을 다 생각케 한다.
김천일이 검술훈련, 습사하는 것을 보고 왜란을 짐작하여 양식을 모아 두었다는 양씨부인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모 양산숙을 천거하고 기동력도 있어서 즉시 일을 성사시키는 모습 또한 믿음직스럽습니다. 누구보다 든든한 동지애를 느낍니다.
몸을 일으킴 김천일이 양산숙을 부장으로 삼아 창의하였다. 양산숙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서 분당 때 서인으로 이이, 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 유성룡을 배격하였다. 양산숙의 조부는 기묘사화 때 화순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고 죽은 개혁의 화신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이다. 유교를 근본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한 조광조는 비록 37살에죽었지만 그를 숭앙했던 사림들이 선조 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장악하여 사림 천하가 되었다. 수많은 인재들이 차고 넘쳤으나 이후 파당을 이루어 서로 정권을 장악하고자 이전투구 하여 임진왜란이라는 백척간두의 환란을 만났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김천일과 고경명이 창의하여 수많은 의병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서인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 인맥들이 탄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두 사람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갑옷을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몸을 이끌고 자식들과 더불어 창의하는 김천일이야말로 참선비라 하겠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임진왜란 초기에 순절하였는데 전임자가 정3품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 고경명이었다. 서인이었던 고경명은 1591년 건저 문제로 정철이 탄핵당한 것과 엮이어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1592년 4월 15일에 송상현이 순절하였고 고경명은 그해 7월 10일 아들 고인후 등과 순절하였으니 두 충신의 죽음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내 충성된 마음을 환히 비추리라 -靜菴 趙光祖 절명시
10회 천지신명이시여 읽으면서 건재 김천일 의병장의 인품을 생각하게 됩니다." 경서의 스승의 쉽지만 인생에 대한 스승은 더 어렵다는 말씀" 전쟁을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던 행동하는 지식인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 봅니다. 집단 이기주의 시대 꼭 배워야 할 교훈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천겁의 시간이 흘렀어도 옛일이 아니다.(歷千劫不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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