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兎死狗烹 1944년 10월 14일 사막의 여우, 독일 민족의 영웅 에르빈 롬멜이 히틀러 암살 기도 계획 공모 혐의를 받고 자살하였다. 공식 사인은 서부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상 악화에 따른 심장 마비로 처리되었다.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해하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유방의 군사를 지휘하여 魏, 趙, 齊 등을 격파하였던 韓信이 BC 196년 반란을 공모했다고 모함 받은 후 참살되었다.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났다.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재임했던 기간 순위를 보면 영조 51년, 숙종 45년, 고종 43년, 선조 40년, 중종 38년, 순조 34년, 세종 31년, 성종 25년, 정조 24년, 태종 17년 등이다. 세종의 치적은 태종의 피바람 위에 영조의 업적은 숙종의 견고한 아성위에서 정조의 업적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 등 영조의 피맺힌 고투를 바탕으로 하였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왕위에 올라 19세기말 일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이씨 왕조 하나 지켜내기에도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선조는 전란기와 평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선조 대에는 중종 이후 훈구파를 몰아내고 대거 사림파들이 등장함으로써 인재들이 넘쳐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선조는 임진왜란 전후에는 제법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를 잘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여는 백성과 조선이란 나라의 안위보다는 개인의 안일만을 추구함으로써 암군의 불명예를 안았으니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거기에 불멸의 영웅 이순신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시기함으로써 그 과가 더 커졌다 할 수 있겠다. 과연 이순신이 일본군의 흉탄에 쓰러졌을까? 위장된 죽음이 아닐까? 말 업슨 靑山이오 태 업슨 流水ㅣ로다 갑 업슨 淸風이오 님자 업슨 明月이라 이 中에 病 업슨 이 몸이 分別 업시 늙으리라 -牛溪 成渾
정철은 세자를 책봉하는 건저 문제를 건의하기로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등과 합의한다. 하지만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정여립 모반 사건 때 당한 복수를 위해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산해와 유성룡의 속을 꾀뚫지 못한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 책봉할 것을 건의 하지만 노한 선조는 정철의 관직을 박탈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서인들이 외직으로 쫓겨나고 동인들이 득세하게 된다. 김천일은 비록 정철이 유배를 가더라도 견디기만 한다면 후에 복권돼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우계 성혼에게 정철을 부탁하고자 붓을 드는데...
<명심보감>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 하늘은 복록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항상 되새겨야할 내용인것 같습니다.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선조대,정철도 희생양이 되었네요.옳고 그름 상관없이 주장이 서로 다르거나, 자기 이익에 반하면,무조건 실각시키고 보는무서운 조직입니다.그러나 실각한 사람은세옹지마로 희망을 가졌겠지요.두꺼비,징그럽고 염치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김천일장군이 일편단심 집을 지켜주고늘 의연하다고 하니 다시 보입니다.
인심은 아칙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시상 일에 너무 개의치 말그라~~~다만 자기가 허는 일이 진실허다믄하늘도 알고 땅도 알아주는 벱이다.”자연도 아침저녁으로 한달두달로 사시사철로 시간에 따라 변하듯이 민심역시 수시로 변한것이 너무 당연할듯 합니다 이세상에는 영원한것은 결코 없을것 같습니다순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것이 우리의 참다운 모습일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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