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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의 목민관이 어떻게 근무하였는지를 알아보려면 나중에 다시 그곳을 방문해보면 알 수 있다.김천일이 유수로 근무하였던 수원. 이제는 의병장이 되어 다시 찾았으니 감개가 남 달랐으리라.김천일이 의병장이 되어 나타났다는 소식에 색리들은 도망하고 양민들은 모여들었다고 한다.이같은 현상은 바로 김천일이 명관이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김천일은 수원유수로 부임하면서 토착세력들과 색리들의 불법을 발본색원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한 많은 양민들이 누명을 벗고 김천일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병을 지원하여 의병 숫자가 2천 명으로 늘어난다.그러나 토착세력들의 불법 척결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김천일도 결국은 유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같은 병폐는 6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다행이 현 정권에서 적패청산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무진 애를 쓰고있지만 아직은 국민들 피부에 와 닿지가 않는 것 같다.검찰 개혁이 완성되기 전에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지난 총선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를 끝까지 믿고 공정하고 깨끗한 나라를 기대해 본다.
나주 금성관을 떠난지 20 일만에 김천일이 이끄는. 나주의병군은. 수원독성산에. 도착하고 김천일은 막둥이로부터 외숙 이광익의 죽음을 접한다 어릴적 부터 외숙의 도움을 많이 받은 김천일은 슬픔에 옥놓아운다 한편 의병의 숫자는 2천명이 넘어서며 사기는 올라가고 결전의 날을 기다린다 조선의병을 이끄는 김천일의 모습과 의병들의 고단하고 지친 모습이 지금을 편히사는 우리와 겹쳐 고맙고 감사함이 가득해진다
굶어 죽다 의병장 김천일이 어릴 때부터 형처럼 따랐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흔쾌히 식량을 내어준 외숙 이광익의 허망한 죽음을 보니 고대 중국의 백이숙제가 떠오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폭군인 殷나라의 紂王을 멸하러 가는 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이 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한 백이숙제가 과연 옳은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달기의 미모에 빠져 충간을 하는 신하들을 살해하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과중하게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은 폭군을 정벌하는 것이 인에 어긋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문호 루쉰도 백이와 숙제를 ] 그가 가장 미워한 유교적 위선자의 대표로 보고 한 단편에서 어리석은 인물로 심하게 폄하하였다. 기본적으로 절개를 지키는 충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인물들이지만 단순히 왕에게 절개를 지키는 걸 중시하는 소극적인 의미의 충신에 지나지 않으며 백성들의 삶을 중시하는 진정한 민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이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도 왜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한양, 개성, 평양을 내어주고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넘어가려한 왕을 떠받들려고 한 이광익의 행동이 과연 의로운 일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이광익을 업고 금강을 건넌 유랑민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이 워디 있댜. 백성을 놔두고 도망친 임금이 임금인겨?“ 하지만 이런 부정적 시각은 현대적 시각에 불과하고 임진왜란 그 당시에는 임금이 만백성의 어버이고 임금이 잡히면 전쟁 자체가 끝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굴복함으로써,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一片丹心 忠臣不事二君 죽음을 불사한 이광익의 정신은 의병을 일으켜 몸소 전쟁에 참가한 김천일 만큼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登彼西山兮采其薇矣 서산에 올라 고사리나 캐야지 以暴易暴兮 포악을 포악으로 바꾸면서도 不知其非矣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我安適歸矣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고? 于嗟徂兮 아! 이제는 죽음뿐이다 命之衰矣 쇠잔한 우리의 명운이여 - 采薇歌 (伯夷叔弟)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아모리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나니 -성삼문
하얀 무명옷에 짚새기를 신고 비 맞아 가면서 한손에 창칼을 들고 낮에는 더위에 밤에는 모기의 공습을 받으며 몸에서 썩은 달걀 냄세는 서로 맡으며 나라와 국왕을 구하겠다면 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달려 갔군요 평소에는 기득권들의 토색질에 변변히 대응하기도 힘든 현실에서도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그래도 그런 나라를 위하여 일어 섰습니다 우리의 민중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고 명절 연휴때에 방속국에서 테스를 불렀던 유명가수의 멘트가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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