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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중 마지막 식사~~~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귀한 소를 잡아 만든 소고기 주먹밥을 입에 넣어 먹으면서 무슨생각을 하였을까요 ~~~ 오지도 않은 증원군만을 기다리며 내일이면 또 다시 살아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다들 말들은 안했어도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아쉽고 짠한 생각만 듭니다 오랬동안 좋은 역사소설 연재에 감사드립니다~~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세가 열세에 처하자 김천일 의병장은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했던듯 성안의 소를 모두잡아 군사와 성민에게 먹이네요. 촉석루에서의 마지막 식사 눈물겹습니다. 촉석루에서 마지막 수세에 몰리자 왜적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남강에 뛰어든 김천일과 김상건, 어디라도 아버지를 부축하겠다고 함께 남강에 뛰어든 김상건의 비장한 효심에 목이 메입니다. 또한 왜군을 한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진주성을 벗어난 황대중의 용기도 가상합니다. 김천일이 진주성을 죽기로 사수한 덕분에 호남이 지켜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義兵이라는 이름 12월 초순인 요즘 날이 제법 쌀쌀하다. 어제는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렀다. ‘영산강의 꿈’ 마지막 회를 읽고 끝장을 덮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려 잠시 컴퓨터를 정지해놓고 뒷산을 한 바퀴 돌다왔다. 자식을 껴안고 투신하는 김천일 의병장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아버지를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김상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하고 또 한편으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것 같다. 1590년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동인 김성일은 왜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같은 동인이었던 류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가 되어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하여 왜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싸움 때 김성일은 병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선거이를 비롯한 관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또한 평양성 전투의 승리로 왜의 만주 진출을 막았다고 판단한 명나라도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로 인하여 김천일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과 백성들의 처참한 죽음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2차 진주성 싸움을 두고도 동인인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 패하였다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보성 출신 서인 안방준은 김천일 의병장을 옹호하면서 류성룡을 비판하였다. 1차 진주성 전투 때처럼 관군과 의병 거기에 명의 협조 등이 있었으면 왜의 전쟁의지를 확실하게 꺾어 그 뒤에 벌어진 정유재란 등의 또 다른 피해를 막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정파에 따른 평이야 어찌되었건 김천일, 양산숙, 황진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의 선혈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알고 다시 한 번 순국선열 영령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묵념을 올립니다. 또한 훌륭한 선열들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느라 애쓰시는 후손들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달을 이불재 글 감옥에 자기 자신을 가둔 채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김천일 의병장을 비롯한 호남 의병들의 혼을 일깨워준 정찬주 작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영산강의 꿈이이 마지막 제호 일월처럼 빛나리를 달고 32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혼돈의 시대 우리 민족에게 촛불 같은 스승의 이야기를 전해주신 정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시 감사 인사 올립니다. 오래 전에 남원 남고서원을 방문 했을때 일제 이항 선생 스승과 함께 배양된 고제자 나주 출신 문열공 김천일 선생에 대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고 이번에 나주 정렬사를 방문하면서 그리고 연재 소설를 읽으면서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혼돈의 시대 學行일치하셨던 옛 조상님의 선비정신이 일월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최종회를 다 읽고나서 작가는 왜 이 소설 제목을 '영산강의 꿈'이라고 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영산강'은 김천일 창의사와 의병들이고, '꿈'은 임금을 한양으로 모셔오고 호남을 지키내자는 것이 아니었을까?만일 그렇다면 영산강은 그 꿈을 이루고 해와 달처럼 지금도 빛나고 있는 것이리라.영산강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해와 달처럼 끊어지지 않고 흐를 것이다.진주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전쟁에서는 패한 것이 아니다.왜군들은 비록 승리는 하였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들도 수만 명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다.왜군들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군사 10만여 명. 이에 비해 아군은 훈련되지 않은 의병까지 해서 겨우 1만여 명물론 진주성민 5만여 명이 큰 도움이 되긴 하였지만 군사로만 비교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였다.그런 소수의 군사로 10여 일을 버티고 있을 때 영남 의병들이 조금만 도와 주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후방 걱정없이 진주성을 2중 3중으로 애워싼채 10여 일 동안 공격을해서 겨우 승리한 왜군.그들은 승리는 하였지만 전리품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바로 성을 빠져나와 부산과 울산으로 후퇴 하였다.왜군은 조선의 군사나 의병들이 진저리가 쳐지도록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패잔병들처럼 도주하였던 것이다황진과 장윤에 이어 이종인까지 전사하고, 왜군에게 밀려 촉석루에 이르렀을 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이에 김천일은 성안에 있는 소를 모조리 잡아 군사들에게 소고기 육회가 들어간 비빔밥을 싫컷 먹도록 했다.그리고 본인은 임금에게 4배하고 아들 상건이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부모님께서 주신 몸을 왜적들에게 더럽힐 수는 없다는 신념에 아들 상건이도 기꺼이 아버지와 함께 한 것이다.뒤이어 양산숙이 투신하자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3장사로 불리웠던 고종후도 뒤를 따랐다.그러자 하급 장수들도 마치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처럼 남강에 투신하였다.이를 바라본 왜군들은 질려버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을 지킬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영산강의 꿈을 위하여 인명과 지명을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을 근거로 연재해준 정찬주 작가에게 그동안 수고하였고 고맙다는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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