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 "고려왕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고려시대 나주는 "어향(御鄕)"이라 불렸습니다. 나주 출신 장화왕후에게서 태어난 아들(혜종)이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고려 제2대 왕위에 등극했기 때문입니다. 성종 2년(983) 전국 12목 중 하나로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되었으며, 성종 14년(995)에 이르러 병마절도사를 두어 군대의 칭호를 진해군(鎭海軍)이라 했습니다. 현종 2년(1011)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피난왕도가 되었으며 (1011년 1월 13일~1월 31일), 현종 9년(1018) 전국 8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려 현종이 건넜다는 다리 사마교비(駟馬橋碑)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족이 침입해왔을 때 현종과 신하들은 고려 제2대 왕 혜종(惠宗)의 외가로 고려왕실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자 호남의 3대 목(牧)이었던 나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때 현종은 금성산성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현재 "사매기"라 불리는 곳에 있던 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그 후 이 다리는 "사마교"라 불리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653년 당시 금성현감 정지호가 다리를 중수하고 비를 건립한 것이 지금의 "사마교비"입니다. 그래서 이 비가 있던 거리를 지금도 "사매기"라 부릅니다. 지금은 다리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에전에는 금성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사마교 밑을 흘렀다고 합니다. 사마교비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사마교비는 나주 금성관 뜰에 옮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