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학헌(琴鶴軒)이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란 뜻입니다. 전통관아 특유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목사내아 정문을 들어서면, 마사토가 깔린 정갈한 마당과 목사내아, 우측의 오백 살도 넘은 "벼락 맞은 팽나무"가 보입니다.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는 정남향의 한옥이며 남도에서 보기 드문 ㄷ자형 구조입니다. 나주읍성 안에 있던 관아건축물 중 객사(客舍)인 금성관, 아문(街門)인 정수루 등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목사 유석증 방
고려 성종 때부터 조선 말까지 부임한 나주목사 가운데 두 번이나 목사를 지낸 인물로 유영한 유석증 목사를 기념하여 이름 하게 되었으며, 유석중 방은 큰방과 작은 방, 가운데 작은 거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유석증은 1610년(광해군 2) 8월 나주목사로 부임했으나 두 달 만인 10월에 이임되었습니다. 그 후 9년 뒤인 1619년(광해군 11) 6월 유석증은 다시 나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광해군일기 12년 5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나주백성이 쌀 삼백 석을 바쳐 유석증을 목사에 제수한 은혜에 사례하였습니다." 유석증이 전에 나주를 다스릴 때 유애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는 상소를 올려 목사로 삼아주도록 청하였고, 왕명으로 다시 부임해오자 고을 백성이 쌀을 바쳐 사례한 것입니다. 1621년과 1622년에는 나주사람 염공일, 진사 김종해 등이 쌀을 바치며 또다시 유석증의 유임을 청하였다고 하니 그를 향한 나주백성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목사 김성일 방
나주 최초의 서원을 세운 판결의 달인 학봉 김성일 목사를 기념하여 이름 하게 된 김성일 방은 툇마루 방향으로 가로로 배치되어 있는 두 칸짜리 방이며, 작은 방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거실의 형태입니다.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임박한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돌아와 "왜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황윤길과는 달리 "왜는 조선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583년 부임하여 3년간 나주목사를 지낸 김성일은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재임 시절 민원 처리에 주력한 그는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와 나씨 간의 송사를 해결하였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로 유명하였습니다.
또한,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나중에 경현서원으로 이름이 바뀜)을 세우고 "동방오현"으로 꼽히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으며, 그가 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세운 대곡서원은 나주 최초의 서원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