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호남의 작은 서울"
나주는 금성산과 서울의 삼각산, 영산강과 한강의 자세가 닮았다 해서 "소경(小京)"이라 불렸습니다. 세조 2년(1457) 병영의 하부조직인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목사(牧使)가 병마사를 겸임하였으며, 효종 8년(1657) 나주거진(羅州巨鎭)을 전라우영(全羅右營)으로 개편함에 따라 우영장(右營將)을 두어 2군 8현의 군비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후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목사와 우영장을 없애고 나주군수를 두고 나주관찰부(羅州觀察部)를 설치했습니다.
조선시대의 5성급 호텔 금성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금성관(錦城館)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했다고 하며, 조선 시대 나주목의 객사(客舍)였습니다. 객사란 외국의 사신이나 조정의 고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묵어가던 "조선 시대의 5성급 호텔"입니다(동쪽 익헌과 서쪽 익헌을 숙소로 사용했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놓아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임금께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즉, 금성관은 왕을 모신 곳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정청으로 향하는 포장된 길 중에서 가운데 길은 예전엔 왕만이 다닐 수 있는 길(어도 御道)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왕만이 걸을 수 있었다는 그 길을 따라 천년 나주목의 기상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일제강점기 군청 청사로 사용되며 훼손된 금성관
금성관은 일제강점기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며 내부를 개조하고, 유리 창문을 달아 쓰는 등 원래의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1976년에 완전 해체ㆍ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97평의 면적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금성관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규모가 조선 시대 나주목의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열었던 곳이자,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유림들이 빈소를 설치하고 곡을 했던 일로 유명합니다.
뒤뜰에 서 있는 6백 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
금성관의 현판 글씨는 그 힘찬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7살 먹은 아이가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간 것이라는 이야기와, 중국사신 주지번이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금성관 앞뜰에는 금성토평비(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으로부터 나주성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5년(고종 32)에 세운 비석), 사마교비 등의 비석들이 늘어서 있으며, 뒤뜰에는 물며 6백 살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금성관의 오랜 역사를 굽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