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이란?
조선 중종 25년(1530) 이행 등이 왕명에 따라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고 개정한 인문지리서(목판본 55권 25책).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정치사ㆍ제도사의 연구는 물론, 특히 향토사 연구에도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나주목(羅州牧)
개요
동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7리, 광산현(光山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영암군(靈巖郡) 경계까지 50리,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무안현(務安縣)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함평현(咸平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42리입니다.
건치연혁
본래 백계의 발라군(發羅郡)이며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 금성(錦城)이라고도 함)으로 고쳤습니다. 신라 말 견훤이 후백제라 칭하고 이 땅을 모두 차지했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군인(郡人)이 후고구려의 왕 궁예에게 붙자, 궁예는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고, 주사(舟師 : 수군)를 거느리고 가서 쳐 빼앗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鐵海單)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습니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을 피해 남방으로 파천하여 이곳에 와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환도했습니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가 세조 때 진(鐵)을 두었습니다.
관원
목사(牧使), 판관(判官), 교수(敎授)각 1 人
풍속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정도전의 기(記)에 있습니다). 음사(淫祀 :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숭상합니다. 가게를 벌여 물건을 팔고 삽니다. 민속이 순박합니다(이예(李芮)의 시에 있습니다).
형승
모든 산이 북으로 향하였습니다(허백(許伯)의 시에 있습니다). 남방의 한 거진(巨鐵)입니다(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있습니다).
산천
금성산(錦域山)이 주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진산(鐵山: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입니다. 정도전(鄭道傳)의 <消災洞記>에, "금성산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傳)하여 동북에 웅거하였으니 나주의 진산이다"라고 했습니다. - 이하 생략
토산
전복, 숭어. 은어, 오징어, 낙지, 굴, 김, 황각, 비자, 표고, 감초, 미역, 숫돌, 차, 석류, 사기그릇, 대(竹), 매산, 웅어
성곽
읍성(邑城)을 돌로 쌓았습니다. 주위가 3천 1백 2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이 20개, 샘이 12개, 작은 시내가 하나 있습니다.
학교
향교(鄕校)가 성의 서쪽에 있습니다.
창고
영산창(榮山倉)이 금강진(錦江津) 언덕에 있으니 곧 영산현(榮山縣)입니다. 나주 및 순천(順天), 강진(康津), 광산(光山), 진도(珍島), 낙안(樂安), 광양(光陽), 화순(和順), 남평(南平), 동복(同福), 흥양(興陽), 무안(務安), 능성(綾城), 영암(靈巖), 보성(寶城), 장흥(長興), 해남(海南) 등지의 전세(田稅)를 여기에 거두어들였다가 배로 서울에 운반합니다. 금상(今上) 7년에 이 창고에 거두어들이던 것을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으므로 폐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