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학문에 대한 깊이감과 천재성을 가진 백호임제
임제는 22세에서 29세까지 대곡성운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것으로 유명하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데 속세가 산을 떠나더라”
도불원인인원도 산비리속속리산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理山]
- 속리산을 하산하며 남긴 시-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
북창이 맑다 하거늘 우장없이 길을 나서니
산에는 눈이오고 들에는 찬비온다
오늘은 찬비 밪았으니 얼어서 잘까 하노라
- <寒雨歌>로도 전해지는 백호 임제가 한우를 만나서 읊은 시 -
어이 얼어 자리 무슨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 (鴛鴦枕 翡翠衾)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
- 백호 임제의 <寒雨歌>에 대한 한우의 화답시 -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紅顔을 어디두고 白骨만 묻혔느냐
盞 잡아 勸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라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조정의 비판을 받은 유명한 이 일화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 측면보다 더불어 풍류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진 현실에 대한 백호 임제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측면으로 해석되어야 맞지 않을까?
백호 임제와 황진이의 인연 이야기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시인 임제는 벼슬길을 멀리하며 기행과 방랑생활을 일삼았다. 당시 재색 겸비로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는데,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대 고대했던 만남을 바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조선의 대 문장가가의 조선 최고의 기녀에게 예(禮)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잇는 이 일이 훗날 조정에서 논란이 되어 벼슬 좌천과 파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후 그렇지 않아도 속박과 낡은 관습을 싫어했던 임제는 당쟁(黨爭)으로 물든 조정의 현실을 개탄하며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고 기생, 승려, 묵객 등 당대를 주름잡는 자들과 교우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충청도 감사의 아들에게 말 오줌을 신선이 마신 불로주라 하여 마시게 한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 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서울가는 나그네가 개성을 지나는데
만원대에는 인적도 없고 계곡 물은 성벽을 돌아 흘러가네
슬프다. 오백년의 역사여
두견새 우는 소리에 청산이 빨려 들어가네
- 옥봉 백광훈 -
풍류 유람의 길동무인 백호 임제와 서로 마부를 하루씩 교대하여 관서팔경을 유람하고 개성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데다 노자마저 떨어져 할 수 없이 어느 부잣집 신세를 지기로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임제가 수작을 거는데, ‘주인장 어르신, 오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 놈이 글을 곧 잘하니 시나 한 수 읊게 하시지요.’라고 하면서 ‘운자는 서울 경이다.’하며 옥봉에게 분부한다.
옥봉 백광훈은 행색은 하인이지만 약속한 듯 북을 들어 거침없이 일필휘지하는데, 그때 주인장이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전라도에서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을 잘한다고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글 잘하는 하인은 생전 처음 보았소.’ 하며 경찬을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저희들이 바로 백옥봉과 임백호입니다.’ 라며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